[소설] 제3장 어떤 세월 39회

  • 입력 2015.10.16 13:49
  • 수정 2015.10.16 13:52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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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1972년이었다. 그와 함께 ‘하면 된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곳곳에 붙었다. 농협 창고의 긴 벽에는 붉은 페인트로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쓰였다.

시곡마을에서는 아랫말과 웃말 사이를 나누는 작은 등성이를 밀고 그 곳에 마을회관을 지었다. 정부에서 내려온 시멘트로 블록을 찍어 지은 열두 평짜리 건물이었다. 그리고 마을회관은 곧 불어 닥친 새마을운동의 마을 거점이 되었다.

우선 선택에게도 중대한 신변상의 변화가 생겼다. 십년 가까이 다니던 농협에서 나와 새마을운동 군지부의 총무가 된 것이었다. 그것은 그 해 처음으로 농림부에서 실시하기 시작한 독농가 연수에 다녀오고 나서 생긴 일이었다. 본래 고장에서 건실하게 농사를 짓고 있는 젊은 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농협 직원을 겸하고 있던 선택은 참여하기 어려운 연수였다. 하지만 지난 번 청와대 행이 억울하게 무산되기도 했고 면내에서 여러 가지 소득 증대를 위한 사업을 주도한 것, 결정적으로는 권순천의 천거로 참가하게 된 것이었다. 그 해 2월에 실시한 2차 연수는 13박 14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경기도 고양에 위치한 농협대학이라는 곳에서 진행된 연수는 선택의 눈을 새로이 띄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을 다니지 못한 아쉬움이 가슴 한 편에 남아있던 선택은 대학교수들과 고위 공무원들의 강의를 들으며 자신이 우리나라 농촌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다는 강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주창한 새마을운동이 제대로 되면 정말 잘 사는 농촌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영상으로 보여준 이스라엘과 유럽의 농촌을 보며 무한히 감탄하기도 했다. 그런 마음은 함께 참여한 120여 명의 사람들 모두 비슷했다. 그러나 선택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과 감동은 연수 막판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 일러스트 박홍규

그 날도 연수생들이 교실에 모여 강의를 듣고 있었다. 서울 농대 교수의 강의는 열정에 차 있었다. 저마다 필기구를 앞에 놓고 한창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데 칠판 글씨를 쓰고 돌아서던 강사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더니 벙어리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청산유수로 강의하던 그가 돌덩이처럼 굳어지자 그의 눈이 향한 곳으로 일제히 눈이 쏠렸다. 강의실 맨 뒤쪽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곳곳에서 탄성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기에 앉아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대통령 박정희였다. 연수생들이 알아채지도 못하게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쏠리자 뒷문에서 양복을 차려 입은 건장한 남자들 넷이 번개처럼 들어와 대통령의 주위에 섰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던 선택에게 대통령의 얼굴이 뚜렷하게 들어왔다. 마르고 강단 있게 생긴 사내는 웬일인지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각하, 어찌 이렇게, 이렇게……”

교수는 이미 분필을 놓고 두 손을 비비며 어쩔 줄 몰랐다. 연수생들이 누가 시킨 것처럼 일제히 일어나 대통령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선택 역시 저도 모르게 허리를 반으로 꺾으며 깊숙한 인사를 얼렸다.

“내가 몰래 들어와서 그냥 보려고 했는데, 여러분 추운 날씨에 고생이 많습니다.”

대통령이 일어나 짧게 한 마디를 던졌다. 키는 작았지만 약간 뒤로 젖힌 듯이 꼿꼿하게 허리를 편 그는 작은 거인처럼 보였다. 대통령의 말에 어디선가 박수가 터졌고 이내 장내가 떠나갈 듯이 박수와 함성이 일어났다. 선택은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여러분, 열심히 강의 듣는데 방해가 되어서 되겠소? 여러분들 손이나 한 번씩 잡아보고 얼른 돌아가겠소.”

모든 연수생이 줄을 지어 대통령과 악수를 했다. 그는 가끔씩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어디서 오셨소?”

선택과 손을 잡은 대통령이 짧게 물었다.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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