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잡곡 관세를 깎아드립니다

수급조절 목적으로 자발적 TRQ 증량
참깨 저율관세 수입물량, 의무수입량의 12배
FTA 양허제외한 대두도 장기적으론 ‘개방’

  • 입력 2015.10.10 14:34
  • 수정 2015.11.08 00:02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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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 정부는 수급조절을 목적으로 잡곡의 TRQ 물량을 자발적으로 증량시켜왔다. 이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국내 잡곡 농가의 현실과 궤를 같이 한다. 지난 6일 서울 양재동 양곡도매시장의 한 업체에 다양한 잡곡이 진열돼 있다. 한승호 기자
우리나라의 식용대두 관세는 487%다. 수입 콩이 정상적인 관세를 치른다면 가격은 국산 콩의 2배에 가까워 경제성이 없다. 그래서 수입 콩은 저율관세할당(TRQ)이라는 한정적 물량에 한해서만 5%의 저율관세로 들어오고 있다. 이렇게 들어온 수입 콩의 가격은 국산 콩의 3분의1에 불과하다. TRQ 물량의 대대적인 증량이 있다면 그것은 값싼 수입물량의 범람을 의미하며 이는 국내산업의 몰락과 직결된다. 우리 잡곡 농가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WTO TRQ, 정부 ‘자발적 증량’

우리나라는 우루과이라운드 무역협상 당시 WTO에 제출한 이행계획서(CS)에 따라 1995년부터 일부 농산물에 TRQ 물량을 배정했다. 고율관세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저율관세 할당량이었지만, 정부가 의무할당량 이상으로 이것을 늘리면서 국산보다 3~4배 저렴한 수입 잡곡이 시장가격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CS에 따른 식용대두의 의무 TRQ 물량은 18만5,787톤이다. 그러나 농식품부는 매년 30만톤 언저리의 WTO TRQ 운영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실제로 수입되는 물량이 계획물량을 거의 채우고 있다(표 참조). 최근 논란이 한창인 ‘밥쌀용 쌀’과 같이, 늘려야 할 의무가 없는 TRQ를 해마다 10만톤 이상씩 스스로 늘리고 있는 것이다.

콩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TRQ 의무물량이 1만4,694톤인 팥·녹두는 매년 3만톤가량을 저율관세로 들여오고 있고, 의무물량이 6,731톤인 참깨는 8만톤가량이나 들여오고 있다. 의무물량의 무려 10배가 훌쩍 넘는 양이다.


정부는 이같은 TRQ 증량의 이유를 수급조절이라 설명한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우리나라 참깨 소비량이 10만톤인데 국내 생산량이 1만2,000톤이다. 나머지 물량은 TRQ를 증량해 충당할 수밖에 없다. 고율관세로 들여오자면 일단 수입이 가능할지도 의문이지만 들여온다 해도 엄청난 물가상승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정부가 지나치게 소비자 중심적인 관점에서 TRQ를 운용한다는 지적도 있다. 지금의 TRQ 증량은 결과적으로 수출국들에게 정상적인 관세를 깎아주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꼴이며, 궁극적으로는 고율관세와 더불어 산업을 지키는 데 기여해야 할 TRQ의 본질이 훼손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박형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은 “국내 잡곡생산량이 부족해 부득이 수입을 하고 있는데, TRQ 증량이 당장은 편하고 달콤한 방법이지만 어린아이가 패스트푸드를 먹는 것처럼 우리 농업의 체질을 점점 허약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충분히 자급률을 높일 수 있음에도 정부도 농협도 이를 전혀 고민하고 노력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FTA 피해도 눈덩이 … 대책은 있나

FTA로 인한 관세 철폐 효과도 큰 위협으로 다가온다. 현재까지 우리가 체결한 FTA에서 상대국마다 차이는 있지만 보리, 옥수수, 팥, 메밀 등의 잡곡이 장기 관세철폐 항목에 이름을 올렸다. 발효시점으로부터 길게는 15년 후엔 무관세 잡곡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한다.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주요 수출국과의 협상에서 양허제외한 식용대두도 안심할 수는 없다. 이들 3개국과의 FTA에서 정부는 식용대두에 ‘현행관세 유지’ 혹은 ‘양허제외’라는 표현을 쓰고서 TRQ 제공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FTA TRQ는 WTO TRQ와 별개의 개념이다. 위에서 설명한 WTO TRQ에 별도로 추가되는 TRQ로 저율관세가 아닌 무관세다. 발효 1년차에 1만톤, 2년차에 2만톤, 3년차에 2만5,000톤의 TRQ를 제공하며 4년차부터는 매년 복리로 3%씩 증량한다.

복리 3% 증량에는 기한이 없다. 올해 현재 FTA TRQ로 수입한 콩은 미국·캐나다·호주산을 통틀어 3만1,000톤 정도지만 15년 이내에 10만톤을 넘어서며, 50년 이내에 현재 전체 콩 수입량을 넘어선다는 계산이 된다. 환경이나 여건 등의 변화로 TRQ 증량이 계속 유지되기는 힘들다는 게 정부 측 설명이지만, 의무 TRQ 물량이 늘어난다는 것은 자급률 회복의 골든타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뾰족한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국산 잡곡은 계속해서 수입 잡곡에 떠밀리고 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WTO에 FTA는 잡곡 농가에게 설상가상이고 이중고다. 농가를 보호하기 위한 고율관세는 허수아비로 전락했고, TRQ는 농가를 배신하고 있다. 농가를 위한 대책이 절실한 이 시점에, 올해 정부가 콩에 지급하는 FTA 피해보전 직불금은 1㎡당 고작 47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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