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고무신②] 고무신도 짝이 있다

  • 입력 2015.09.25 10:5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상락 소설가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말은 이동전화 회사의 광고 문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손전화의 번호와 소속회사를 옮기듯이 사랑의 대상도 그렇게 옮겨 다닐 수 있다는 얘기렷다? 하지만 사랑이란 마음을 주고받는 거래인지라, 새롭게 부가된 서비스를 좇아서 번호를 바꾸고도 휘파람을 불거나 멀쩡하게 시침 뚝 뗄 수 있는 손전화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게 문제다.

군대 간 남자의 애인이 변심하는 것을 두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라고 하거나, 애인을 다른 남자로 갈아치우는 것을 일컬어 ‘고무신 바꿔 신는다’라고 하는 표현이 언제 어떤 연유로 생겨났는지는 모르겠으나, 고무신을 끌어댄 그 비유 하나는 절묘하다. 내가 복무했던 기간에만도 우리 부대(중대)에서,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애인을 만나러가겠다며 부대를 무단이탈했다가 ‘남한산성’(군대 감옥)에 간 친구도 두 명이나 되었고, 심지어는 고무신을 바꿔 신은 여자 때문에 소총의 총구를 자신에게 돌려 방아쇠를 당겼던 끔찍한 사례도 있었다. ‘움직이는 사랑’의 속성(?) 때문에 생긴 비극이라고 할까?

하지만 사랑만 움직이나? 고무신도 움직인다. 물론 종국에는 대체로 제 자리로 돌아오게 돼 있으니 그 점이 사랑하고 다르다면 다르다.

이른 아침, 토방마루로 내려서려던 아부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를 부른다.

“워째서 고무신이 둘 다 오른 쪽 뿐이여? 너 요놈 들고 가서 짝 맞춰 갖고 오너라.”

나는 군소리 없이 아부지의 고무신짝 둘을 들고서 영길이네 집으로 간다. 그러나 댓돌 위에 놓인 영길이 아부지의 고무신은 멀쩡하게 제 짝을 갖추고 있다. 다시 재갑이네 집으로 간다, 옳다구나, 그 집 토방에 놓인 흰 고무신은 왼짝만 둘이다. 다행이다.

그러나 간밤에 아부지가 함께 어울려 막걸리 잔을 기울였던 대상이 두 사람 정도였으니 바뀐 고무신의 제 짝을 찾는 일이 수월하였지만, 수십 명이 모여 흥청거리는 잔칫집에 다녀온 뒷날이면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자네 혹시 신짝 안 배꼈능가?”

“나도 그래서 나왔는디…어디 한 번 벗어보소.”

누군가의 집에서 마을 잔치가 있었거나, 혹은 마을회관에서 회의가 있고난 다음 날 아침이면 골목길 여기저기서 신발짝을 대보고 신어보고 바꿔 신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바뀐 고무신짝이 제 자리를 찾는 과정이 늘 그렇게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돌아간 장날에 신을 새로 샀다는 것은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디, 어디서 이따구 헌 고무신을 신고 와서 슬쩍 바꿔가? 불량한 놈 같으니라고!”

“뭣이여? 불량한 놈? 이 고무신, 전에 내가 새로 샀다가 안 신고 실겅에 놔뒀던 것을 어지께 잔칫집에 첨으로 신고 나간 것이여!”

그렇게 멱살잡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어른들의 흰 고무신은 아무리 봐도 고놈이 고놈 같고 크기도 같은 문수가 부지기수였는데, 잔칫집 토방마루에 놓인 수십 개의 신발짝 중에서 자기 고무신을 척, 찾아 신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나 같은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자기 고무신을 척척 찾아 신을 줄 아는 신통한 능력이 없었으므로 무엇인가 다른 방편을 궁리해야 했다. 나는 엄니가 먹고무신을 새로 사오던 날, 연필 깎는 깔로 바닥에다 표식을 하였다. ‘상’자를 새기고 싶었으나 둔한 칼을 가지고 이응(ㅇ)자를 새기는 것은 불가능 하였으므로 그냥 시옷(ㅅ)자만 새겨 두었다.

그런데 오전 수업이 끝난 뒤에 복도의 신발장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새로 산 나의 먹고무신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5교시 시작종이 울리자마자 복도로 나가서 신발장 앞에서 아예 보초를 섰다. 그러다 같은 마을 상석이 놈이 바로 나의 새 고무신을 벗어 드는 현장을 잡았다.

“너 왜 놈의 신을 신고 댕기는 것이여?”

“뭣이여? 이거 내 신인디?”

나는 바닥의 표식을 가리키며 내가 주인이라 하였는데, 상석이 역시 자기가 해놓은 표식이라 하였다. 경주 이 씨 집성촌인 우리 마을에는 돌림자인 ‘서로 상(相)’자를 쓰는 아이가 천지사방에 널렸으므로 시옷(ㅅ)자는 내가 독점할 수 있는 표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결국 내 신을 찾았다. 표식을 하다가 손을 베어서 발랐던 ‘아까징끼’가 신발코에 자국을 남겼거든!

사랑도 고무신처럼 그렇게 떠났던 제 짝을 찾아 돌아올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