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고무신①/ 먹 고무신 한 켤레

  • 입력 2015.09.19 16:43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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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부산에 사는 페이스북 친구와 문자로 대화를 나누다 “요즘도 고무신을 파는 데가 있느냐?”고 물었다. 아마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는데 사나흘 뒤에 연락이 왔다. 고무신 가게에 와 있는데 신발을 몇 밀리 신느냐고 물었다. 감격하였다. 와, 요즘도 고무신을 파는 가게가 다 있다니, 역시 왕년의 신발산업의 메카였던 부산은 다르구나! 그런데 “고무신을 몇 밀리 신느냐?”는 질문에 나는 얼른 대답을 못 했다. 사실 그렇게 묻는 것은 고무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구두나 운동화가 아닌 고무신이라면 “몇 문 신느냐?”라고 물어야 한다. 그랬다면 내가 고무신을 최종적으로 신었을 때의 크기였던 “십문 칠!”이라고 씩씩하게 대답했을 텐데.

1960년대 초에 정부에 의하여 미터법 사용이 강제되었다. ‘너도 나도 계량에는 미터법 단위로!’ 라는 표어가 교실 여기저기에 나붙었다. 되. 말, 척, 관, 근, 마지기…따위 그 동안 써오던 모든 단위를 없애고 무슨 그램, 킬로그램, 미터, 킬로미터…따위로 대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즐겨 부르던 <고향땅>이라는 동요는 ‘고향땅이 여기서 몇 리나 되나…’, 이렇게 시작하는데 어느 날 문교부에서 공문을 내려 보내서는 ‘고향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로 바꾸라고 하였다. 리(里)라는 단위는 미터법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활 속에 뿌리내린 기존의 것들을 어찌 쉽게 버릴 수 있겠는가? 고무신의 문수(文數)야말로 좀처럼 밀리미터 따위, 서양에서 건너온 말로 대체하기가 어려운 단위였다. 1970년대 중반에 군에 입대하여 훈련소에서 전투화를 지급받을 때 신병들은 너도나도 ‘십문 칠’을 중얼거렸다. ‘십문 칠’은 대한민국 남자들의 표준 발바닥 크기이자, 고무신 하면 떠오르는 추억의 문수가 되었다.

부산의 친구로부터 선물이 왔다. 흰고무신과 먹고무신(우리는 ‘깜장고무신’이라 하지 않고 ‘먹고무신’이라 불렀다) 각 한 켤레씩이었다. 먹고무신에 먼저 눈길이 갔다.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흰고무신은 대개 어른용으로만 나왔고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 내내 먹고무신을 신었다. 말표, 기차표, 왕자표…나중에는 타이아표 고무신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먹고무신 두 짝을 방문밖에 나란히 놓고서 감회에 젖었다. 그러고는 신었다. 흥미로운 것은 운동화나 구두를 신을 때는 허리를 굽혀 손가락으로 신발 뒤축을 수습하는 동작을 따로 해야 하지만 고무신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발가락 쪽을 신발코에 걸치고서 두어 걸음만 끌고 걸으면 저절로 뒤꿈치가 고무신 안으로 쏙 들어갔다. 소나기가 내려서 비설거지를 하러 후다닥 마당으로 뛰쳐나갈 때, 군대 갔던 아들이 첫 휴가 나와 사립을 들어설 때… 토방이나 댓돌에 놓인 고무신짝에 일단 발가락만 집어넣고 두어 걸음만 옮기면 저절로 신발 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니 신고 벗기가 고무신만큼 신속하고 효율적인 신발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신고 벗기가 편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비가 와서 진창이 된 길을 걸을 때면 고놈의 신발짝은 수시로 주인을 배신했다. 진흙탕에 찰싹 안겨서는 맨발만 쏙 내보내기 일쑤였다. 되돌아와 구덩이에 묻힌 신발을 빼내어 다시 신는다. 하지만 진흙 때문에 발바닥이 미끌미끌, 간질간질…그러니 걸음이 제대로 걸릴 리가 없다. 하지만 무슨 걱정이랴, 곧 만나게 되는 냇물에 씻어내면 그만이다. 흙투성이의 고무신을 씻을 때에도 손으로 거들 필요가 없다. 신발 앞코를 발가락 쪽에 걸친 채로 휘휘 저으면 흙이 제풀에 씻겨 내려간다. 그런 다음 발끝을 하늘로 향한 채 움직이면 고무신 뒤축이 발뒤꿈치에 탁탁탁 부딪치면서 고여 있던 물기가 털려나간다. 들일을 마친 농부가 맨 마지막에 하는 일도, 흙 묻은 신과 발을 냇물이나 논물에 헹군 다음, 꼭 그렇게 탈탈 터는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 탈착(脫着)이 쉽다는 점 때문에 고무신이 진짜로 원망스런 때가 따로 있었다. 운동장에서 편 갈라 공차기를 할 때, 새끼줄로 한 번 동여맸음에도 불구하고 공보다 신짝이 먼저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는 때이다. 무정하게 공중으로 날아가는 신짝을 좇아 눈을 들었을 때, 국기봉 너머로 보이던 파란 가을하늘! 그 시절 나의 꿈도 그렇게 푸르렀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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