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술②/ 「술 조사」 나온 날

  • 입력 2015.09.13 09:58
  • 수정 2015.09.13 09:59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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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시방으로부터 509년 전인 1506년 정월달에 연산군은 요즘의 비서실 격인 승정원에 선온(宣醞)을 내린다. 선온은 임금이 내리는 술이다. 그냥 술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시 한 수도 곁들여 하사한다. 임금이 직접 쓴 어서시(御書詩)이다. 그 내용을 보니 뜻밖에도 막걸리 찬가다.


막걸리야 너를 누가 만들었더냐
한 잔으로 천 가지 근심을 잊어버리네


원문을 보니 ‘濁醪誰造汝 /一酌散千憂’ 요렇게 돼 있다. 조선시대에 막걸리를 어떻게 표기했을까, 궁금하여 뒤져보다가 <연산군일기>에서 발견한 구절이다. 막걸리는 한자로 ‘요()’라고도 적고 혹은 ‘탁료(濁醪)’라고도 적었다. 조선시대의 술 빚는 방법을 기술해놓은 <양주방>이란 문헌에서는 막걸리를 ‘혼돈주(混沌酒)’라고 부르고 있다. 대낮에 막걸리 마시고 취하면 부모도 몰라볼 만큼 정신이 혼돈 속을 헤매니까? 에이, 그건 아닐 것이다. 술 담그는 항아리에서 청주를 따로 떠내지 않고 ‘막’ 뒤섞어 퍼내어서 체에다 ‘걸러’버렸기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어쨌든 남들 비싼 양주 마실 때 막걸리나 마시고 있다고 신세 한탄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천하의 연산군이 극찬하고 있지 않은가!

어린 시절 나는 콩나물시루와 술독과 한 방에서 지냈다. 집안의 장남인 내가 윗목으로 밀려나 떨며 자든 말든, 엄니는 늘 고놈들을 따뜻한 아랫목에 모셨다. 어떤 때는 이불마저 뺏겼다. 엄니는 내가 덮고 자던 이불을 갖다 들씌워서 고놈들을 파묻었다. 방바닥의 열을 빼앗기지 않아야 발아(콩나물) 혹은 발효(술)가 잘 되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엄니가 나가자마자 이불을 가차 없이 도로 벗겨내어 덮었다.

담그고 나서 얼마쯤이 지나면 술 익는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온다. 일찍이 술꾼의 기질을 타고났던지 내겐 그 냄새가 매우 익숙하고도 고소하였다. 살짝 뚜껑을 열어보니 여기저기 뚫린 구멍 위로 뽀록, 뽀록…익어가는 기척을 한다. 그때쯤이면 아부지가 술독을 윗목으로 옮기고 또 얼마 뒤에는 아예 광으로 운반한다. 아랫목에 오래 두면 금세 쉬기 때문이다. 광으로 옮기고 나서 얼마 뒤에는 필요에 따라 술독 위쪽에 정제된 맑은 부분을 따로 떠낸다. 그것이 바로 청주다. 하지만 고놈의 것은 너무 독해서 어린 우리가 혀를 갖다 댈 것은 아니었다.

아랫목에 있던 술독이 윗목으로, 혹은 다시 광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술 생각이 나면 수시로 엄니한테 술을 거르라 하였는데, 엄니는 체로 한번 밭아내고 남은 지게미에다 자꾸만 물을 더 부어서 손으로 쥐어짠다. 하지만 더욱 걸쭉하고 독한 막걸리를 마시고 싶은 아부지는 제발 물 좀 그만 부으라고 잔소리를 한다.

그런데, 술독의 이동경로가 ‘아랫목→윗목→광’으로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이웃집 재갑이 아부지가 쿵쾅쿵쾅 달려오더니 우리 집 사립너머에서 소리친다.

“술 조사 나왔어! 빨리빨리!”

이때야말로 ‘주어’나 목적어를 되물을 겨를도, 필요도 없다. 아부지는 방안에 있던 술독을 들고 마당으로 나와서 두리번거리다가 급한 대로 짚 벼늘(볏짚 낟가리) 뒤에다 파묻는다. 하지만 술독이 제법 큰 경우 이웃집 어른을 불러 함께 낑낑거리며 멀리 보리밭 고랑까지 운반하여 감추기도 하였다. 이윽고 술 조사 나온 사람들(세무 공무원들)이 집 안팎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 집은 아부지가 현직, 혹은 전직 이장이라는 끗발이 있었기 때문일까, 대개 건성으로 조사를 하고는 다음 집으로 몰려갔다.

어린 내가 보기에 술이 있는지 조사하겠다고 나온 사람들이나, 조사반이 떴다 하면 술독이나 누룩을 들고 허둥대는 마을 사람들이나 이해난망이었다.

‘참말로 이상하당께. 다 큰 어른들이 소풍날 보물찾기 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라고 똑같은 음식인디 왜 술 조사만 하는 것이여? 콩나물 조사는 안 한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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