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34회
[소설] 제3장 어떤 세월 34회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5.09.05 2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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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알토란같은 문전옥답을 그냥 내놓으라고 하면 말이 안 되쥬. 대충 봐도 우리 땅이 들어갈 거 같은데, 그 땅을 마련할라고 우리 아부지가 오만 고생을 다 한 거야 동네 분덜두 다 아실 거 아뉴?”

전에 선택에게 경을 친 적이 있던 호중이 선택의 눈치를 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는 제 아버지가 머슴을 살며 마련한 몇 뙈기의 논밭을 일구며 농사를 짓고 있었고 선택이 하는 일이라면 엔간한 일에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렇지만 역시 농군의 자식이라 땅에 대한 애착은 대단했다. 선택은 호중을 확실하게 눌러야 다른 사람에게서 말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 일러스트 박홍규

“천호중 씨가 한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이 일은 나라에서 하는 일이니만큼 국민된 도리로서 거국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농촌의 정서가 무엇입니까? 사소한 개인의 이익과 불이익을 따지기 전에 주민 모두가 합심하는 게 농촌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이번 일이 잘 안 되면 우리 마을은 정부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불량 마을로 찍히게 되어서 아주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렇다면 마을에서도 부득이 동계를 열어 제명을 한다거나 하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불량 마을 운운은 말을 하는 도중에 떠올라 뱉었을 뿐 누구에게서 들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마을이든 제대로 사업을 하지 못한다면 관으로부터 찍힐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아직 옛 정서가 남아있는 마을에서 동계는 마을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었다. 시곡마을의 동계는 당연히 정씨 일가가 쥐고 있었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동계였고 동계에서 제명된다는 것은 곧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의미였다. 기실 면 직원들과 회의를 하면서 최종적으로 그런 식으로 주민들을 위협하여 땅을 희사하게 하자는 계획을 짜두었던 것이다.

동계에서 제명한다는 협박 비슷한 말에 그 누구도 다시는 불평을 꺼내지 못했다. 다음 날부터 선택은 청년 두엇을 데리고 마을길을 측량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말이 측량이지 주먹구구였다. 새끼줄을 한 타래 풀어가며 길을 곧게 잡고 중간중간 말뚝을 박는 게 다였다. 넓이는 우마차 두 대가 서로 비킬 수 있을 정도로 잡았다. 기존에 있던 길보다 곱절은 넓은 데다 직선으로 쭉쭉 새끼줄을 매어놓으니 신작로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번듯했다. 문제는 선택이 사람들에게 공언했던 것보다 실제로 길로 수용되는 땅의 면적이 훨씬 넓어진 것이었다. 백여 평 가깝게 들어가는 집만도 셋이나 되었다. 공교롭게도 선택의 땅은 한 뼘도 들어가지 않았다. 미안하고 난감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새끼줄을 다 친 다음 선택은 제 주머니돈을 풀어서 큰 돼지 한 마리를 잡았다. 잔치나 벌어진 듯이 술과 돼지국밥을 퍼먹으며 사람들은 우선 입이 벌어졌다. 동네 아이들까지 북새통을 치며 이슥하도록 술판을 벌이며 선택은 또 한 번 다짐을 두었다.

“다들 알고 계시지만 이번에 마을길을 닦는 건 모두 우리 손으로 해야 합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며칠이 걸릴지 알 수도 없습니다. 한 집에서 한 명씩 남자들이 부역을 해야 합니다. 남자가 없는 집은 여자분이라도 나와서 함께 해야 합니다. 물론 빠지면 골전을 물어야지요. 그 대신 열흘이 걸릴지 한 달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 동안 사흘거리로 돼지 한 마리씩을 잡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잘 먹어가면서 일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당장 저희 종가에서 쌀 한 가마와 돼지 한 마리를 내기로 했구요, 나머지는 동계 기금으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와아 하는 함성이 나왔다. 술에 취해 흥분한 이들 중에는 발을 구르며 좋아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 사흘거리로 돼지 잡고 술을 주면 석달 열흘인들 못할까. 나라에서 나오라는 부역 나가도 막걸리 한 잔 주는 법이 없는데 내 동네 일하면서 날마다 잔치판이면 부역이 아니라 호강이지. 안 그려들?”

한 해에 두 번 명절이 아니면 고기국물 한 번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애들이 많고 가난한 집의 남정네들은 부역을 하게 된 게 다행이라는 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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