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가슴을 쳤다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23

  • 입력 2008.02.24 14:46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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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한번밖에 없는 정월대보름날 아침부터 밀가루만 생각하다가 쓸쓸하게 보내고 말았다.

나무 아홉 짐을 하고 밥 아홉 그릇 먹는다는 정월대보름 아침에 나무하러(복숭아나무 전정만 하면 나무는 많이 생긴다) 갈까 말까 갈등을 하느라고 애꿎은 담배만 연거푸 태워 없앤다. 그래도 명색이 명절인데 이제껏 농땡이만 치다가 정원대보름날 일하더라는 흉이라도 잡힐까봐 그것도 걱정이다. 지금까지 해놓은 일이라곤 50그루가 채 될까 말까라 걱정은 태산이지만 핑계 삼아 하루 눈 질끈 감기로 했다.

그런데 어머님이 밖에서 불러댄다. 손자들이 다 보고 있는데도 쉰 살이 벌써 지난 아들 이름을 날로 불러대신다.

“종문이가 꼬재이를 줍는데 인자 얼마 안 남았다. 전지 빨리 해라.”

둘째 놈이 어제부터 전지목을 주워 모으는 일을 시작하더니 그새 다 모은 모양이다. 어머님은 아이들이 개학을 하기 전에 빨리 일을 끝내야 한다고 오래 전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는 밖에 나가 정월대보름날 일하면 동네 사람들이 욕한다고 궁색한 변명으로 어머님을 경노당으로 가시게 하고 방안으로 들어간다.

방문을 열다 말고 나는 깜짝 놀란다. 아르바이트를 하러가기 위해 세수를 마치고 마루로 들어서는 큰놈 얼굴이 영 말이 아니다. 오른쪽 눈 위에 큼지막한 생채기가 나 있고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얼굴이 어째 좋지 않아 보인다.

“니 얼굴이 와 그 모양이고?”

녀석은 싱긋이 웃기만 할 뿐 몇 번이나 물어도 말이 없고 나는 가슴이 텅 내려앉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며 불쑥 물었다.

“니 한잔하고 전봇대하고 한판 했나?”

그렇게 말하는 내 언성이 좀 높았던지 아내가 아이들 방에서 나오며 대신 대답을 한다.

“어제 ‘짱깨이’ 배달하다가 오토바이 사고 냈다느마.”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녀석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상처는 아무래도 오래 갈 것 같아 보였다. 나는 녀석의 옆구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오토바이는 안 다쳤느냐고 물어보니 “철가방만 박살났는데요.”한다.

녀석은 설 며칠 전부터 용돈을 벌어 쓴다고 중국집 배달 일을 시작했다. 일당 5만 원이면 녀석에게 큰돈이다. 벌써 그동안 번 돈으로 양복을 사 놓았다고 한다. 일년을 살아야 양복 입을 일이 이틀도 안 되는 내게는 그것이 또 불만이긴 하지만.

아내가 큰놈을 중국집까지 배달(나는 요즘 그렇게 이죽거린다) 해주러 간 뒤에 나는 방안에 멍하니 앉아 짜장면(자장면이 아니라 짜장면이라고 해야 옳은 말이다)을 생각했다.

아니 밀가루를 생각했다. 밀가루. 밀가루. 밀가루만 죽어라고 되씹어 보았다. 세계 곡물가가 오르는데 식량 감산 정책을 펴면서 무방비 상태로 살아왔던 우리의 밀가루공화국이 은근히 걱정이다.

나는 몇 해 전에 썼던 시 한 편을 꺼내 본다.

“쌀값 폭락했다고 데모하러 온 농사꾼들이 먼저/밥이나 먹고 보자며 짜장면 집으로 몰려가자/그걸 지켜보던 밥집 주인 젊은 대머리가/저런, 저런 쌀값 아직 한참은 더 떨어져야 돼/쌀농사 지키자고 데모하는 작자들이/밥은 안 처먹고 뭐! 수입밀가루를 잡숴?/에라 이 화상들아/똥 폼이나 잡지 말든지//나는 그 말 듣고 내 마음 일주문을 부숴버렸다”

뻔질나게 데모하러 다녔던 사람들은 알리라. 밥은 먹어야 하는데 그 많은 사람들 밥 사 먹이자니 농민회의 썰렁한 주머니 사정이여! 쌀을 지키려면 쌀밥을 고봉으로 먹고 크게 힘을 써야 하는데 된장에 밥 먹을 형편이 못 되는 그 비애여! 만만한 게 홍어 좆이라고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짜장면 한 그릇으로 대충 허기나 끄고 으싸, 으싸 한판 붙으러 가던 그 적반하장의 농사꾼들이여!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애써 변명할 이유가 없으며 부끄러워하지도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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