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술①/ 술심부름
[그 시절 우리는] 술①/ 술심부름
  • 이상락 소설가
  • 승인 2015.09.0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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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술은 어른 앞에서 배워야 뒷날 술버릇이 곱게 든다고 했다. 하지만 육칠십년대에 농촌에서 소년기를 보냈던 대부분의 남자들은(더러는 여자들도) 어른의 앞이 아니라 어른의 ‘뒤’에서 은밀히 음주학습을 했다. 그것도 혼자서 수행하는 자율학습이었다.

“도갓집에 가서 막걸리 한 되만 받아오너라.”

어느 해 초여름, 밭에서 보리를 베던 아부지가 술심부름을 시켰다. 얼씨구나, 잘 되었다. 오늘은 나도 단짝 동무 영준이가 해봤다는 그 기분 좋은 시도를 기필코 해보리라.

‘주전자 주둥이를 물고 다섯 모금을 마셨그등. 그란디 기분이 징하게 좋아진시롬 하늘이 뱅그르르 돌고… 빨간 구두 아가씨, 그 노래가 저절로 나온당께.’

영준이가 제 혼자 신천지라도 다녀온 양 그렇게 자랑을 늘어놓기 이전까지는, 나는 감히 술을 입에 댈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우선 내가 알고 있던 술이란 놈은 냄새가 고약할 뿐 아니라 독하고 맛도 없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먹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술에 대한 그런 인식에 빗금을 그어도 좋을 경험을 했다. 동무들하고 딱지치기를 하고 돌아왔더니 엄니를 비롯한 동네 어멈들 네 명이서 단술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안방 아랫목에 있는 항아리에서 아직 턱없이 덜 익은 술을 양푼에 퍼 내와서는, 거기에다 사카린을 타서 나눠먹고 있던 것이다. 체에 거르지도 않은 그것을 대접에 담아 숟가락으로 떠먹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음주(飮酒)가 아니라 식주(食酒)였다. 다음 날, 나도 엄니가 하던 대로 항아리에서 반 종지기쯤을 몰래 떠내어 사카린을 타서 먹어 보았다. 달착지근한 게 먹을 만했다. 한참 뒤에 기분이 약간 야릇해진 듯 했으나 아무리 쳐다봐도 하늘은 끄떡 없이 제자리에 있었고 빨간 구두 아가씨 노래는 가사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술 그거 별 것 아니구나, 그런 느낌을 얻은 것은 되바라졌으되 매우 값진 경험이었다.

얼마 뒤에 드디어 아버지가 집에서 주전자를 건네며 술심부름을 시켰다. 그런데 도갓집에서 술을 받아서 집에 이르는 길이 마을사람들이 뻔질나게 오가는 동네 한복판의 고샅이어서, 여남은 살짜리 꼬맹이가 주전자를 쳐들어 음주를 시도하는 것은, 심성 착하기로 마을 사람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나로서는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내 건너에 있는 보리밭에서 아부지가 술심부름을 시킨 것이다. 도갓집에서 우리 밭에 가려면 마을을 벗어나 외진 들길을 한참이나 걸어야 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술판’을 벌일 곳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일단 집으로 가서 주전자를 챙긴 다음, 도갓집으로 가서 술 한 되를 받았다. 주전자를 들고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그날따라 오른팔을 통해 울려오는 꿀렁꿀렁, 소리에 가슴까지 덩달아 울렁거렸다.

“여그가 좋겄구먼.”

나는 시냇가 바위에 걸터앉아 주전자를 치켜든 다음, 주둥이를 입에 물고 다섯 모금을 들이켰다. 단술보다 훨씬 독했으므로 한손으로 코를 잡고 삼켜야 했다. 그러고는 어른들이 말하는 ‘담배 한 대 필 참’쯤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살짝 몽롱해졌으나 여전히 하늘은 돌지 않았고 노래도 나오지 않았다. 두 모금을 더 마셨다. 기분이 약간 좋아졌다. 아, 나는 거기서 술맛을 알아버렸다. 하지만 걱정이 생겼다. 뚜껑을 열어봤더니 주전자 속 막걸리의 수위, 아니 주위(酒位)가 손가락 두 마디쯤 내려앉아 있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주전자 속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하였다.

“조심해서 들고 와야제…술을 솔찬히 흘렸구나.”

그렇게 넘어갔다. 보리 베기는 이튿날까지 이어졌고 또 한 번 술심부름에 나섰다. 그날은 두 모금을 더 마셔버렸다. 겁이 났으므로 주전자 뚜껑으로 냇물을 두 번이나 떠서 주전자 속에다 부었다. 술맛을 본 아부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불량시런 도갓집 쥔장 놈 같으니라고, 해도 해도 너무 하네. 이거이 술이여, 물이여!”

아부지는 도갓집 쥔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했으나 그 뒤는 난 모른다. 그날 저녁 창자 속 쓴물까지 게워낸 나는 앞으로 절대로 술 따위는 입에 대지 않으리라 다짐을 거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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