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낀 하늘 아래 가지밭

  • 입력 2015.08.28 13:14
  • 수정 2015.08.28 13:25
  • 기자명 안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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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안혜연 기자·사진 한승호 기자]

충북 음성군의 복숭아 재배 농가로 농활을 가려던 하루 전, 갑작스러운 태풍 고니의 북상으로 농가로부터 농활이 어렵겠다는 연락이 왔다.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허둥지둥 다른 지역을 물색하던 중, 다행히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에서 가지를 재배하는 농민 김학남씨가 농활을 쾌히 승낙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김씨에게 몇 시부터 일을 시작하시나 여쭙자 “날씨가 더워 (오전) 6시부터는 하죠”라며 허허 웃는다. 일찍 가야겠다 싶어 나름 서둘렀다고 했는데 도착하니 7시 30분. 김학남씨는 이미 시설하우스 가지 꽃 수정 작업에 한창이다.

▲ “비보다 바람이 무섭다.” 농민이 툭 던진 이 한마디에 가지 지줏대 사이를 줄로 연결하는 작업에 온 심혈을 기울인다. 본지 안혜연 기자가 지난 26일 경기도 여주시 흥천면의 한 가지밭에서 농활을 하고 있다.

나도 수정 작업을 돕겠구나 생각하면서 팔토시를 주섬주섬 끼고 있는데, 김씨가 수정 작업은 고난이도라 어려울 것이라며 나를 노지 가지밭으로 데려갔다. 오늘의 할 일은 줄 매기. 가지 가 강한 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줄기 주변에 줄을 치는 것으로, 초짜중의 초짜인 나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 나 수정시키고 올 동안에 하고 계셔~”라며 김씨 부부가 하우스 안으로 총총 사라지고 남은 조용한 가지밭에서 열심히 줄을 매보기 시작한다.

비가 온 다음날의 선선한 아침 공기가 얼굴에 와 닿자 일하기에 딱 좋은 날에 맞춰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김씨 부부는 폭염 속에서 일하느라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날은 먹구름과 흰구름이 번갈아가면서 해를 가렸는데, 그래도 이따금 햇빛이 나면 바로 등이 따갑고 힘이 배로 들어가면서 덥다는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무더위 속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이 진심으로 존경스러워지는 순간이다.

▲ “할 수 있겠어?” 김학남, 이미석씨 부부가 안혜연 기자에게 가지에 묶을 끈을 건네주며 웃고 있다.

새참을 먹고 김씨 부부는 가지 수확을 시작했다. 수확은 전문적인 손길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줄을 매며 눈치만 보고 있다가, 조심스레 김씨 부부에게 수확을 도와드려도 되겠냐고 묻자 선뜻 가위를 쥐어준다. 알고 보니 가지는 과수만큼 수확 작업이 까다롭지 않다고. 아직 덜 자란 것은 그대로 두고, 길게 자란 가지만 골라 따야하는데 도무지 크기 가늠이 되지 않아 김씨의 아내 이미석씨의 도움을 받아가며 하나하나 수확하기 시작했다. 서서 줄을 맬 때와는 달리 쭈그려 앉았다가 엉거주춤 서다가 수레를 밀다가를 반복하다보니 허리가 뻐근해져왔다. 그래도 이씨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수확하니 견딜 만했다.

“농사짓는 게 몸은 힘들지만 마음이 편하잖아요. 도시처럼 어디 매어있지 않고.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내 농사지으면 되는 거니까요.” 이씨의 농촌 예찬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맞다. 마음이 편해야 뭐든 편안하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이라 이날 수확량은 많지 않았다. 전날 50개들이 94상자 수확한 것의 거의 절반 수준이다. 그래도 가지 가격은 잘 나온다고 한다. 김씨는 “보통 여름 휴가철에 시세가 제일 떨어지는데, 올해는 50개들이 상자에 1만원까지도 나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해엔 시세가 2,000~3,000원 선까지 떨어져 멀쩡한 가지를 다 버리곤 했다고 한다.

▲ “수확해봐도 될까요?” 농민에게 배운대로 가지 수확에 나서지만 좀처럼 수확이 되지 않는다. 크기 가늠이 쉽지 않아서다.

김씨는 거의 30년 가까이 가지를 전량 가락시장으로 출하하고 있다. 수확한 가지는 운송기사가 김씨가 속한 작목반원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실어 시장으로 운반한다. 운 좋게 점심을 먹다가 바로 그 운송기사를 만날 수 있었다. 김씨의 동생 김학모씨다. 농산물 운송 일을 한지 벌써 몇 십 년이고, 시장의 일은 훤하게 꿰고 있단다. 어제 가락시장에서 경매된 가지 가격만 보고도 어느 집에서 출하한 것인지 대번에 나온다. 유통담당 기자로서 지나치기 아쉬워 연락처를 따냈다.

농사지으면서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이냐 김씨 부부에게 묻자 “일하는 건 어차피 그날이 그날이고 똑같이 힘들죠. 농사꾼은 하늘이 제일 무섭지”라고 말했다. 특히 비 보다는 바람이 무섭다며 예전과는 달리 몇 년 전부터 ‘이상한’ 바람이 분다고 했다. 아주 거센 바람이 최근 몇 년 사이에 가끔 찾아오는데 하우스 비닐이 날아가고 철근까지 휜다고 한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씨는 “아줌마들이 제일 힘들어. 밭에서 일하고 집에 들어가서 살림도 하잖아”라고 웃으며 뼈있는 한마디를 던진다.

오후엔 고랑을 따라가며 길게 줄을 두르는 작업을 했다. 줄 매는 작업도 계속하다 보니 손가락이 얼얼하다. 그래도 “평소에 대학생들이 농활 와서 줄 매기를 도와주고 가서 큰 힘이 되는데 올해는 메르스 때문에 농활이 취소됐다”는 말을 듣고 나니 더 열심히 줄을 매게 된다. 매번 농활에 참여하지만 기자들의 사진을 찍느라 본인은 사진에 나타나지 않는 한승호 기자도 줄 매기에 합세해 오후 4시를 조금 넘겨 가지밭의 줄을 모두 맬 수 있었다. 처음엔 그 넓은 밭을 보며 언제 다하나 싶었는데 끝내고 나니 뿌듯함이 느껴졌다. 다가올 마감은 잠시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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