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 나의 20살 농활

<농활수기 딸림상> 오주성 단국대학교 법학과

  • 입력 2015.08.23 14:21
  • 수정 2015.08.23 14:22
  • 기자명 한국농정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4회 농활수기 수상작

한국농정신문 농활수기가 올해로 4회째를 맞이했습니다. 특히 올해는 메르스로 인해 대학생들의 농활이 대부분 취소가 되거나 뒤늦게 진행하는 등 악조건이 계속됐는데요. 이로인해 농활수기도 예년보다 적게 도착했습니다. 올해도 잊지 않고 보내온 농활수기 중 두편을 골라 버금상과 딸림상을 선정했습니다. 한국농정신문은 지면을 통해 선정된 학생들의 농활수기를 싣습니다.

[딸림상] 그해 여름, 나의 20살 농활

▲ 오주성 단국대학교 법학과
완연히 성숙한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2011년 7월, 새내기였던 20살의 나는 선배들의 꼬드김에 이끌려 농활에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전부터 학회에서 ‘농활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농활에 관하여 선배들에게 지겹도록 들어왔었고, 선배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술이라는 묘약 그리고 술기운이라는 약기운과 함께 농활 하루 전 농활명단에 내이름이 올라가게 되었다.

농활을 출발하는 그날 술이 덜 깬 상태로 ‘우리집이 귤 농사 짓는데 내가 왜 농활을 가야하는 거야. 아 왜 간다고 그랬지? 술이 문제야’라는 후회스런 마음과 함께 버스에 몸을 싣고 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그 순간 나는 ‘와 봉사활동 왔다’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한선배가 내 머리를 장난스럽게 치며 ‘봉사활동이라니 농민-학생연대활동이지 임마’이러면서 나를 끌고 갔다. 그때 나는 ‘봉사나 연대나 공짜로 일하러 온건 마찬가지’라며 가져온 짐들을 들고 마을회관에 들어갔다. 나의 잊을 수 없는 20살, 8박9일의 여름농활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일과는 아침밥을 해먹고 아침에 인원이 필요하신 농민분들이 회관 앞으로 오시면 우리는 인원이 나뉘어서 도울 일을 맡아 일을 하러간다. 나는 최씨아저씨 댁으로 들어갔다. 최씨아저씨의 주 농사는 가지였다. 가지 밭에서 일을 하며 더위와 싸우고 따끔한 풀독과도 싸우며 저녁까지 일했다. 이때 최씨아저씨는 내가 제주도 출신이며 귤 농사를 짓는다는 말에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고, 나도 그런 아저씨와의 대화가 싫지 않았고 즐거웠다.

그 이후로 아저씨께서는 내 고향의 이름으로 내 이름을 대신 하셨다. 아침마다 찾아오시면 매번 ‘어이 제주도 어딨어 제주도 나한테 줘 나랑 일하게’하시면서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렇게 나는 8박9일 거의 내내 최씨아저씨 댁에서 일을 하였다. 하루 농사일을 마친 후 저녁에는 동네 꼬마 애들이 ‘대학생 형들 왔다’ 하며 놀아달라고 한없이 칭얼대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무슨 의무감 비슷한 감정으로 노곤한 몸을 이끌고 농촌의 냄새가 물씬 베어있는 아이들과 함께 놀며 저녁을 보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선배들의 농활교양과 우리가 하루에 있었던 일들과 느낀점을 말하는 대화의 자리가 이어지고 그것을 끝으로 농활의 하루일과가 끝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마을 어르신들과 우리의 유대감은 더욱 끈끈해지고 아이들은 더욱더 우리를 친형 누나처럼 대하였다. 떠나기 전날은 마을의 모든 어르신들과 우리 모두 함께 모여 족구대회도 하고 마을잔치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함께 우리의 농활 마지막날의 이별인사를 대신하였다. 그렇게 우리가 떠나는 날. 짐을 쌓고 마지막으로 마을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쓰레기도 줍고 보이는 집집마다 우리 떠난다는 인사를 하였다.

이제 막 떠나려는 차에 이장님, 최씨아저씨, 마을 청년회장님 그리고 어머님들, 꼬마 아이들이 손에 가지 한 아름, 토마토 한 아름, 쌀 한 아름을 가득 안고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오셨다. ‘우리가 딱히 줄건 없고 이거라도 가져가서 먹어 이거 최상품으로만 골라서 주는거여. 그리고 담에 꼭 또 와서 적적한 마을에 활기를 불어주고 가줘’라는 이장님의 말씀, ‘모두들 수고혔어. 어이 제주도! 복숭아 줄테니까 귤보내줘 하하하’ 언제나 흥겨우시던 최씨아저씨의 말씀, ‘어이구 늙은이들 밖에 없는곳에 아들, 딸 같은 애들 와서 좋았는디 꼭 또 와야 돼’하는 어머님들의 말씀, ‘형! 형! 다음에 또 올거지?’하는 울먹이는 아이들의 목소리. 그 모든 그리움과 아쉬움의 말을 한 아름 짊어지고 우리는 그렇게 작별했다.


그 해 여름이후 나는 농활을 한번도 빠지지 않고 모두 참여했다. 항상 힘들고 노곤한 농촌생활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나에겐 대학 생활 중 하나의 안식처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그 해 여름농활 이후로 나에게 또 다른 변화는 바로 농민, 농촌문제에 대해 더욱더 많은 관심과 집중을 하게 되었다. FTA가 우리나라 농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 식량주권의 중요성 등을 토론하면서 선배들과 친구들과 많은 생각들을 나누었다.

어쩌면 선배들이 지겹게 강조했던 연대라는 단어 그 의미를 지금은 조금 음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씨아저씨와 나의 만남. 다르게 본다면 대학생과 농민의 만남. 농촌어머님들의 자식 대학등록금 고민, 우리 부모님의 농사걱정. 다르게 본다면 대학생 자식을 둔 농민의 고민, 농민 부모님을 둔 대학생의 고민, 농민과 대학생, 대학생과 농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두 계층이 만나 그들을 아는 것, 그리고 나와는 다른 문제인 듯 상관없는 문제인 듯 보이는 그들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이며 나의 문제가 곧 그들의 문제임을 깨우쳐 가는 것. 계층들의 고민은 이어져 있고 곧 그 각각의 문제 해결이 우리 모두의 문제해결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것. 결국 ‘우리는 하나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런 우리를 국민, 시민, 민중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 아는 것이 연대가 아닐까?

그 해 여름 농활은 나에게 세계를 보는 눈을 심어 주었다. 남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고민들이 곧 나의 고민이었다. 군 전역후 세상의 고민을 잊은 채 학점, 스펙에 시달려 사는 나에게 농활을 떠나는 후배들의 모습을 본다. 그 모습에서 잊었던 그 해 여름,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핸드폰을 들어 잊고 지냈던 최씨 아저씨의 번호를 누른다. ‘어이 제주도 오랜만이야’ 이말을 듣는 설렘을 기대하며 나는 잠깐 농민이 되어본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