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토종씨앗] 연분홍 돔비꽃이 피고지고

  • 입력 2015.08.23 11:13
  • 수정 2015.08.23 11:15
  • 기자명 이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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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돔비꽃

▲ 이라연(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
벼농사와 보리, 콩, 팥, 깨 등 잡곡농사가 주를 이루었던 우리나라는 다음해 농사준비를 씨앗 받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거름도 직접 내고 일소를 몰아 밭도 갈고 수확한 것들 중 가장 좋은 것들을 골라 종자로 남겼다. 하늘이 주는 만큼, 내 한 몸 놀려서 얻을 수 있을 만큼만 짓던 시절. 그래서 그 옛날엔 그다지 큰 욕심을 낼 수 없는 이가 농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종자도, 비료도, 이런저런 농자재도 모두 사서 쓰는 시대. 비와 바람을 막은 비닐하우스에선 한겨울에도 쉬지 않고 푸른 것들이 자라나고, 농사에도 도입된 규모의 경제, 각종 FTA와 TPP까지 더해져 조직화되지 않은 가족농, 소농들의 설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슈퍼에 가면, 때로는 생협에서조차도 제철농산물의 개념이 흔들거린다. 5월의 참외, 사계절 빨간 토마토, 한겨울의 고추라니.

종자문제로 들어가 보면 더 막막하다. 우리가 먹는 대다수의 채소나 과채류의 종자는 외국산. 이태리산 당근씨와 일본산 양파씨와 단호박씨앗, 중국산 들깨씨다.

귀농 5년차, 소농 축에도 못낄 소소농인 나는 어떤 농사를 어떻게 지으며 살아야할까. 쥐이빨옥수수, 선비잡이콩, 앉은뱅이밀, 각시동부, 푸른독새기콩 등 이름도 모양도 정겹고 이쁘지만 경제논리에 밀려 점점 사라져가는 토종씨앗 농사도 우영(텃밭) 한 켠에서 지어가야지. 비록 밥벌이농사는 따로 가야겠지만 말이다.

제주도여성농민회와 귀농운동본부, 주변의 지인들을 통해 얻은 이런 저런 토종씨앗들. 처음엔 씨앗욕심에 얻어지는 대로 뿌린 것들 거두느라 애를 먹었다. 힘들어도 늦가을 무렵 스무가지가 넘는 토종씨앗들을 갈무리해놓으면 뿌듯함이 가득.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씨앗만 뿌린다. 맛이 좋아서 잘 먹게 되는 것들만 남겼다.

그 중 하나가 나이 지긋한 삼촌들이 사는 제주의 시골집 우영에서 한창 꽃 피고 꼬투리 맺고 있는 검은돔비, 검은동부. 콩 심은 후가 돔비 차례라고 옆집삼촌이 알려주신다. 6월 초 앞으로 뻗어갈 줄기를 생각하며 조금은 드물게 심는다. 넝쿨이라 돌담 아래면 더 좋다. 이르게 파종한 옥수수 곁에 심어 수확이 끝난 옥수수 대를 타고 올라가게 해도 좋다.

장마와 태풍을 견뎌낸 돔비는 한여름 푹푹 찌는 더위에 쑥쑥 큰다. 파종한지 두 달이 지난 8월이 연분홍 돔비꽃이 한창일 때. 피고 지고 피고 지며 길쭉한 꼬투리를 맺는다. 강낭콩이나 팥처럼 풋콩일 때 따서 밥할 때 넣어 함께 지으면 참 달고 고소하다.

흰 풋콩이 자주색 빛을 띄다 검게 익어가는 건 9월 무렵부터. 최종 수확은 추석이 지나야하지만 그때그때 익는대로 따서 꼬투리째 말린다. 가을볕에 바삭하게 마른 꼬투리를 밟고 두들겨서 갈무리. 작지만 단단한 검은 동부씨앗. 예전엔 동부죽도 쑤어먹었다고 하고 육지에선 동부를 갈아 녹두전처럼 동부전도 부쳐서 먹는다지만 주변 어른들도 그렇고 나도 주로 밥에 넣어 먹는다.

올해 초 태국 북부를 잠시 여행하고 돌아왔는데, 그때 열 시간이 넘도록 달리던 기차칸에서 팔던 대나무찰밥 속에 검은 동부가 콕 박혀있었다. 낯선 이국의 기차칸에서 만난 검은동부, 참 반가웠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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