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없이 국가도 없다

[기획] 광복 70년, 농업 70년

  • 입력 2015.08.16 15:52
  • 수정 2015.08.17 09:11
  • 기자명 원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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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원재정 기자]

“배 꺼질라 뛰지 마라” 고달픈 보릿고개 넘고_<1945~1969년>

‘식량증산’ 일념의 녹색혁명·백색혁명 변화_<1970~1994>

국경 없는 농산물 자유무역 시대…21세기형 보릿고개 ‘경계’_<1995~현재> 

 

 

올해는 광복 70주년으로 각 분야에서 그 뜻을 기리며 축제의 장을 열고 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은 됐지만
먹을 것이 부족했던 지독하게 배고픈 시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업농촌은 변해야만 했다.

때문에 광복 이후 70년의 역사는
농업 70년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보릿고개부터 개방농정까지,
우리 농업농촌의 70년을 되짚어보고
농업선진국의 염원을 모아본다.
 

 

 

‘보릿고개’를 넘다
  <1945~1969년>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전국이 되면서 일제 강점기에 놓였던 한국이 해방을 맞았다. 해방은 됐지만 먹을 것은 없었고, 오랜 수탈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자립 기반을 상실하고 말았다. 농촌경제 재건만이 유일한 살 길이 됐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기 농정의 핵심은 ‘농지개혁’이었다.

▲ 농가부업으로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는 모습_1960년대. 농업박물관 제공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을 통해 60만ha의 농지를 유상몰수·유상분배하는 농지개혁을 단행, 자작농 체제가 마련됐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폐허가 된 대한민국. 농업 혁명의 대장정이 시작됐다. 근본적인 개혁 없이 핏기 없는 ‘보릿고개’를 넘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1950년대 후반엔 농업부분이 연평균 3.4%정도 성장해 식량상황이 다소 나아졌다. 미국의 대규모 원조농산물 도입도 이 시기와 맞물린다.

1960년대 목조 비닐하우스 재배도 시작됐다. 노지농업 일색의 농사형태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1962년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우리 농정은 ‘증산’ ‘생산과정의 근대화’가 제일의 목표가 된다.

▲ 옥수수를 수확한 농민들_1960년대. 농업박물관 제공

 

# 통일벼와 백색혁명
 <1970~1993년>

새마을운동과 통일벼는 1970년대 농정을 대표한다. 1971년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농촌마을마다 울려 퍼진 ‘잘살아보세’라는 단순 반복되는 노래가사처럼 획일적인 목표가 됐다. 이로써 농촌 대부분의 초가집이 서구화된 주거형태로 탈바꿈했다.

1972년부터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기다. 이 시기는 식량증산에서 ‘주곡증산’으로 목표가 재설정된다. 이 무렵 보급된 ‘통일벼’는 다수확 그 자체였다. 보릿고개가 사라진 계기가 된 것도 통일벼의 기여다. 1977년 역대 최고의 수확량을 기록하면서 통일벼 보급 초기인 1971년에 비해 생산량이 50% 급증하기도 했다.

하지만 통일벼는 맛에서 ‘아키바레’에 못 미쳤다. 정부는 수매품종도 ‘통일벼’로 한정할 만큼 확산에 주력했지만, 농민들도 소비자들도 아키바레를 찾기 마련이었다. 해마다 모내기철이면 아키바레를 심다가 농촌지도소에 적발돼 실랑이를 벌이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또한 통일벼의 확산은 다른 곡식들의 자급률을 낮추기도 했다. 통일벼의 전성기이자 쌀 자급을 선언했던 1977년의 전체 곡물 자급률은 60% 전후로 떨어졌다.

이어 1980년대는 일명 백색혁명이라 부르는 ‘비닐하우스 보급’이 붐을 이뤘다. 이를 통해 한겨울에도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한편으론 비농업부분의 비약적 성장 속에 농업은 급속히 위축됐다. 농가경제 악화, 농가부채 급증이라는 굴레가 덧씌워진 시기이기도 하다. 1986년 ‘농어촌종합대책’, 1987년 ‘농어가부채경감대책’이 나올 정도로 농촌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 농산물 시장개방, 세계와 싸워라
  <1994~현재>

1990년대는 공산품만 거래대상이던 ‘세계 무역’이 농산물로 눈을 돌렸다. 바야흐로 농산물 시장개방시대가 된 것이다. 1993년 12월 우르과이협상(UR)이 타결되면서 농산물의 시장개방이 급속도로 진행됐다. 우리나라도 농정의 방향을 국제경쟁력 강화로 재조정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고 한국이 이에 가입하면서 개방농정은 본격화 된다.

▲ 지난해 11월 서울서 열린 '식량주권과 먹거리안전을 위한 범국민대회'에 참석한 농민들이 'FTA 저지' 등을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그러나 여러 나라와의 무역협상이 원활해지지 않자 농업강국들을 중심으로 양자간 무역협상, 즉 FTA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2003년 칠레와 첫 FTA를 체결한 뒤 2015년 현재, 총 53개국과 FTA를 체결하거나 발효 중이다. 올해 쌀마저 관세화 되면서 모든 농산물의 개방시대를 맞았다.

한편으로 농업은 식량생산 외에도 그 기대와 역할이 다양해졌다. 농업농촌의 다원적 가치, 즉 환경보전, 생물다양성 등을 비롯해 휴식, 웰빙 등 도시민들의 마음의 안식처로 재조명 받고 있다.

특히 식량안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새로운 위기로 다가왔다. 식량자급률 20%대에 머물고 있는 빈한한 대한민국의 농업이, 다시 뿌리내리기 위한 국가적 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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