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곡식은 ‘땅’에서 자란다

  • 입력 2015.08.16 10:35
  • 수정 2015.08.16 10:36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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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고향 동네 뒤쪽의 재를 넘어서 한참을 더 걸어가면 산비탈 외진 곳에, 흡사 부잡스런 사내 녀석의 대가리에 난 부스럼 흉터처럼, 작은 밭뙈기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면적이라야 부잣집 마당만큼도 안 되는 자투리 밭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그 곳을 재 너머에 있다 하여 ‘재너미밭’이라 불렀다. 집에서 워낙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봄철 파종기가 돌아오면 아부지와 엄니는 해마다 그 곳에다 농사를 지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말다툼을 하였다.

“밭이라고 꼭 손뿌닥 만한 디다가 뭣을 심어 묵겄다고 헛고생을 해!”

아부지는 그까짓 땅뙈기 그냥 묵히라 하였으나 엄니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작년에 거기에다 깨를 심어서 기름을 네 병이나 짰고, 차조를 심어서 한 말가웃이나 거두었는데 뭔 소릴 그렇게 하느냐, 그러니 여러 말 말고 쟁기질이나 잠깐 해주고 거름 몇 짐만 내어 달라…, 얘기가 그쯤 되면 아부지도 금세 항복을 했다.

그런데 엄니는 그 곳이 외져서인지 재너미밭에 갈 일이 있으면 꼭 나에게 함께 가자고 하였다. 공일날이면 아예 점심밥을 싸가지고 가서 모자가 하루 종일 거기서 살았다.

엄니는 재너미밭에서 김을 매고 거름을 주고 씨를 뿌리는 일만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밭 가장자리 언덕으로는 초등학생이던 내 키 높이만큼이나 자갈무더기가 쌓여 있었는데 엄니는 그 돌들을 매꼬리에 채워 담아 바깥에 내다버리는 일을 쉼 없이 계속하였다. 물론 나도 돌 치우는 일을 거들어야 했다. 자갈무더기를 헐어서 하루 종일 돌을 치워봤자 늘어난 땅이라곤 고작 어른 한 사람이 누울 만큼이었다. 나는 너무 힘들고 따분하고 지친 나머지, 몇 뼘 되지도 않은 땅 고놈을 얻으려고 왜 그 고생을 해야 하느냐며 투덜거렸다. 엄니가 말했다.

“곡식을 땅에다 심어야 하니께 그라제.”

아, 그렇구나. 곡식은 땅에다 심어야 하니까….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기도 하였고, 돌 치우는 작업을 하는 엄니의 모습이 워낙 진지했으므로 더 이상 불평을 말할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한정 없이 더뎌보이던 그 작업으로도 몰라보게 밭이 넓어져가고 있었다.

그 재너미밭 한 가운데에 무덤이 하나 있었다. 우리 집하고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무덤이었다. 애당초 그 무덤도 일정부분 묘역을 갖추고 있었을 텐데, 내가 엄니를 따라 나들이를 할 무렵에는 봉분에서 한두 뼘만 남기고는 모두가 우리 밭으로 편입이 돼 있었다. 엄니는 자꾸만 호미질을 하여 그 한두 뼘마저 밭으로 만들더니, 급기야는 ‘바리캉’으로 머리를 뺑 돌려 깎듯이 봉분의 아래쪽까지 바투 파 헤집어 작물을 심었다. 신기한 것은, 무덤에 가까운 곳일수록 작물이 잘 자란다는 것이었다. 고구마도 수수도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알맹이와 송이가 크고 실하게 달렸다.

나는 무덤 가까이 가는 것이 두려웠다. 게다가 어느 날 보니 두더지의 소행인 듯 봉분에 구멍이 꽤 크게 뚫려 있었다. 그 때까지 나는 하관(下棺)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의 주검을 땅속 깊은 곳에 묻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 하였다. 봉분의 구멍으로 손을 넣으면 바로 시체가 손에 닿을 거라 여겼다. 나는 무덤 가까이에서 캔 고구마는 절대로 먹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

더구나 언젠가 사촌인 상철이 형이 이런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너, 여우가 뭣을 묵고 사는지 알어? 무덤 속에 구멍을 파고 들어가서 시체를 뜯어묵고 산당께. 한 번은 고놈이 무덤 속으로 들어간 것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가서 무덤을 빙 둘러쌌드란다. 그란디 여우가 그것을 알고 무덤 속에서 시체의 옷을 벳게서 구멍 배깥으로 휙 던진 것이여. 사람들은 여우가 나온 줄 알고 몽둥이로 옷을 내려쳤겄제. 그 사이에 여우가 구멍을 빠져나가 도망쳐분 것이여. ‘내 똥구멍이나 뽈아라!’ 하고 말여. 그란디, 너 안 무섭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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