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엄니의 호미
[그 시절 우리는] 엄니의 호미
  • 이상락 소설가
  • 승인 2015.08.0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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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춘천 교외에 있는 부대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 일등병 시절 아침 점호를 마치면 소대별로 부대 인근의 들길과 산길을 따라 한 시간여에 걸쳐 행군을 했다. 배는 고파 죽겠는데 인솔자인 주번사관은 자꾸만 구보에다 노래를 시켰다. ‘동이 트는 새벽꿈에 고향을 본 후 / 외투 입고 투구 쓰면 맘이 새로워…’ 어쩌고 하는 군가를 고래 악을 쓰듯 뱉어내고 나면 맘이 새롭기는 새로에 허기만 더했다.

돌아오는 길, 우리는 인솔자의 눈을 피해 재빠른 동작으로 길가 고추밭에서 풋고추 두세 개씩을 슬쩍하는 보급투쟁을 겸했다. 군부대 근방의 밭주인들도 아예 길가 쪽은 수확을 포기했다. 그랬으니 강원도 사람들이 “저기 군인하고 사람이 지나가네”, 그랬다는 풍설이 나돌았지. 그랬거나 말거나 우리는 된장국이 담긴 식판 가장자리에 풋고추 고놈을 걸쳐 눕히고 숟가락으로 탁탁탁, 칼질을 하여 텁텁한 된장국물을 얼큰한 맛에 먹을 수 있었다.

낮에 야외훈련을 나갈 때 나는 매우 신기한 장면을 보았다. 남녘 출신인 최 일병도 나하고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듯 그가 먼저 이렇게 말했다.

“어어, 남자들이 밭을 매고 있네!”

남자가 호미 들고 밭 매는 장면을 나는 거기서 처음 보았다. 그런데 결혼 직후, 강원도 출신의 아내에게 그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뙤약볕 아래서 밭 매는 일이 얼마나 험한 노역인데 남쪽에서는 그런 힘든 일을 여자들에게 시키느냐?”며 따지는 통에….

내가 좋아하는 <칠갑산>이라는 노래의 그 산이 충청도가 아니라 강원도에 있었다면, 그러니까 만일 노래 제목이 <치악산>쯤 되었다면 ‘콩밭 매는 남정네야 / 배 잠방이 흠뻑 젖는다…’,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남녘지방이라 하여 남자들이 모든 김매기를 나 몰라라 하는 건 아니었다. 논을 매는 일만은 남녀가 함께, 아니 남자들이 주도하였다. 초등학교 시절의 나도 ‘남자’였기 때문에 논매는 일을 도왔다. 키가 작은 나로서는 초벌매기는 그런대로 할만 했으나 재벌매기부터는 볏잎이 자꾸만 모가지를 찌르는 바람에 여간한 고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이삭이 패기 이전에 피를 가리는 일이었다. 아부지가 말했다.

“해를 바라보고 서서 요렇게 햇살에 딱 비춰보면 잎사구가 곱게 비치는 놈이 피랑께.”

하지만 실컷 뽑아놓고 나면 아부지는 아까운 벼를 뽑았다며 지청구를 날렸다. 거기 비하여 보리밭에서 귀리나 깜부기를 뽑아내는 작업은 한결 쉬웠다. 엄니는 늘 마을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였다.

“보리밭에 귀리하고 깜부기가 무성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욕하는 벱이여.”

우리 밭에 귀리나 깜부기가 많기로, 왜 지나가는 사람들이 욕을 하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남자들이 하는 김매기는 그뿐, 보리밭이며 콩밭이며 고구마밭이며 서숙(조)밭이며… 모든 밭매기는 엄니의 일감이었다. 뙤약볕 아래서 한나절 동안 밭을 매고 돌아오는 엄니를 보면 호미 내려놓을 힘도 없어 보일 만큼 지쳐 있었다. 60년대의 어느 시기에 농촌에 ‘나이롱’ 바람이 불었다. 질기기가 쇠가죽 같아서 바느질을 할 필요가 없는 신비로운 옷감이 바로 나일론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땀을 흡수하지 못 한다는 것을 엄니는 몰랐던 것일까? 나일론 윗도리를 입고 밭에서 돌아온 엄니의 등짝은 온통 땀띠로 엉망이었다.

자식들이 모두 수도권으로 이주한 뒤에도 엄니는 호미를 놓지 않았다. 인천의 동생 집에 거처할 때, 엄니는 재주 좋게도 동네 여자들이 만든 ‘호미부대’에 가입하여 김포 등지의 밭으로 출근하다시피 나다니면서 호미 품을 팔았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다.

지금 엄니는 맏이인 나도 못 알아볼 만큼 모든 기억들을 방출해 버린 채로 내가 살고 있는 지리산 인근의 요양원에서 지낸다. 그런데 아주 신기하게도 엄니는 가끔, 그 시절 시골에서 밭 매며 부르던 ‘청춘가’ 가락을 흥얼거린다. 호미등처럼 가파른 생의 마지막 구비를 매우 힘겹게 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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