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물③/ 큰물이 지면

  • 입력 2015.07.19 10:45
  • 수정 2015.07.23 10:24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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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비가 새는 작은 방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 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들국화’를 비롯한 많은 가수들이 불러서 우리의 귀에 익숙한 <사노라면>이라는 가요에서는 가난, 혹은 역경을 ‘비가 새는 작은 방에서의 새우잠’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들국화 등이 이 노래를 발표했던 시기를 놓고 볼 때 노랫말에 도입된 ‘비새는 방’은 좀 생경하다는 느낌이 든다. ‘밀린 월셋방’이라면 모를까.

아니나 다를까, 찾아보니 이 노래는 1966년에 김문응이 가사를 짓고 길옥윤이 작곡하여 쟈니리가 처음 부른 것으로 돼 있다. 제목도 <내일은 해가 뜬다>이다. 그러면 그렇지! 고진감래,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인내는 쓰나 열매는 달다, 형설지공…따위의 슬로건이 난무하던 1960년대라면 비새는 방에서 새우잠을 잤다는 표현은 제 자리를 찾은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옛 시절의 추억으로 떠올리는 풍경이라 해도 거처했던 공간에 따라 차이가 있다. 도회지 판잣집의 비새는 방 풍경이 다시 돌아보기 싫은 ‘남루’ 그 자체라면, 농촌 초가집에서의 그것을 떠올리면 시나브로 웃음부터 난다. “엄니, 여그도 비 새!” “이불 젖으면 안 돼!” “마당에 가서 시숫대 갖고 오랑깨!” “내 공책 다 젖어서 못 씨게 돼부렀어!” “냄비든 함지박이든 더 갖고 와!” “너는 요놈 비우고 와!”…아부지는 여분으로 엮어 둔 마람(이엉)을 가지고 비 구멍을 때우러 지붕으로 올라가고….

이윽고 줄줄 새던 물줄기가 잦아들어 방울이 된다. 우리 육형제는 벽에 등을 대고 둘러앉아 세숫대야며 바가지며 냄비에 물방을 떨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처음엔 바닥에 탁탁, 부딪쳐 들기름 장판으로 튀던 것이 어느 만치 물이 차면 통, 탱, 제법 명랑한 소리를 낸다. 물을 받는 용기에 따라 방울방울의 음색도 다르고 그것들이 어울려 엮어내는 음계도 변화무쌍하다.

내가 떠올리는 그 시절의 ‘비가 새는 방’의 풍경은 정지된 삽화가 아니다. ‘고운 님’은 아닐지라도 살붙이끼리 왁자하게 떠들면서 부산스레 빗물을 받아내던…꿈틀대는 활동사진이다. 그 활동사진 속 형제들 중 두 동생이 맏이인 나보다 먼저 ‘비를 내리는’ 저 위쪽 세상으로 갔다.

‘사라’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태풍이 제주도와 남부지방을 휩쓸었던 때 나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 어렴풋하지만 태풍이 지나간 뒤의 몇몇 풍경이 아직도 내 기억 창고의 맨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다. 동네 사장(祀場)의 거대한 팽나무가 댕강 부러져서 그 가지가 한참이나 떨어진 우물가에 나동그라져 있었고, 바닷가 선착장에 띄워두었던 목선은 30여 미터를 날아서 위쪽 논두렁에 박혀 있었다. 그 태풍으로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이 무려 849명이었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지 않았다.

큰물이 져서 예정에 없던 경험을 했던 기억이 있다. 4학년 때였던가, 전날부터 내리던 비가 수업하는 내내 쉼 없이 쏟아졌다. 학교가 아랫동네에 있었는데 우리는 개천 하나를 건너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 우리는 복도 한 쪽에 벗어두었던 도롱이를 걸치고 교문을 나섰다. 냇가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맞은편에 우리 엄니를 비롯한 학부모들이 나와 있었다. 개천은 우리가 징검다리를 깡충거리며 건너고 송사리를 잡던 그런 내(川)가 아니었다. 물이 불어서 폭이 꽤 넓어졌고, 물살도 만만치 않았다.

“오지 말고 가!”

엄니가 다시 아랫마을로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다. 다른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위로 올라가면 폭이 좀 좁은 데가 있는데 이태 전에 6학년 형이 그곳을 뛰어넘겠다고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그만 물살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은 우리를 마중 나온 게 아니라 혹시나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말리러 나온 것이었다. 그날 아랫마을의 아부지 친구 집에서 꿉꿉한 잠을 잤다.

물,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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