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27회
[소설] 제3장 어떤 세월 27회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5.07.10 14: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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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듬해 봄 인사 때 선택은 산동농협의 정식직원으로 발령이 났다. 선택은 구매부에 속한 말단 직원이었지만 농협 업무 전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부서에서도 근무할 수 있었다. 특히 신용과 금융 부서에서 돌아가는 내용을 선택보다 잘 아는 이는 드물었다. 조합장을 비롯한 간부들, 그리고 지역의 유지들과 끈끈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일러스트 박홍규

그 즈음에 선택은 우연히 어떤 책을 읽게 되었다. 농협에서 공금으로 구입한 책은 대통령 박정희가 쓴 세 권의 책이었다. 지도자의 길,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국가와 혁명과 나, 라는 제목의 책들은 5.16직후부터 3년간에 걸쳐서 나온 시리즈 비슷한 책이었다. 농협에 몇 권을 구비하고도 남아서 조합장이 선택에게 나머지를 준 것이었다.

“정주사가 어쨌든 신입이니까 신입 선물로 주는 거라고.”

조합장이 별 것도 아닌 걸로 생색을 내며 책을 건네주었을 때만 해도 심드렁했는데 책을 몇 장 넘기면서 점점 책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정확히는 책이 아닌 박정희라는 사람이었다. 특히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사회재건의 이념’이라는 책을 읽으며 선택은 그의 생각에 온전히 찬동하였다. 이미 학생 때의 농민운동 경험은 아득한 기억이 되어버렸을지라도 선택은 기본적으로 나라를 잘 살게 하고 농민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박태식과 동업을 하는 고향농산에서 꽤 짭짤한 수입이 들어오고 마음의 절반 이상은 재산을 불리는 데 가 있지만 민족이니 민생고 해결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쓴 책은 구구절절이 그런 내용이었다. 게다가 책에서는 대통령이 가진 독특한 생각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신선하면서도 선택의 생각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선택이 감탄한 대목은 민주주의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그는 사회의 일부 고위층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런 대목도 있었다. ‘전체 국민의 1% 내외의 저 특권 지배층의 손을 보았는가?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보드라운 손결이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할퀴고 살을 앗아간 것인가. 우리는 이제 그러한 것들에 증오의 탄환을 발사하여 주자.’ 마치 그 전에 농민운동을 하며 과격한 언사를 일삼던 서울대학교의 학생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과격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한 말이라서인지 통쾌하면서도 울림이 컸다.

그러면서 박정희는 우리가 실현해야 할 민주주의를 행정적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당장 시급한 부정부패의 척결이나 민생고 해결,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세월을 천연할 정치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부가 앞으로 나서서 이룩하는 행정적인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농촌에서 수많은 농민들을 대하면서 느꼈던 무지에 대한 절망감, 아무리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보수성에 질려있었던 선택에게 그 같은 주장은 눈이 번쩍 떠질 정도로 획기적인 주장이었다.

“이보오, 용범 엄마. 당신은 지금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허우?”

선택이 자리에 누우며 갓난애에게 젖을 물린 아내를 돌아보며 물었다. 읽던 책을 덮고 아직 그 여운이 가시기 전이었다. 백일이 지난 아들을 안고 있던 아내가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선택을 돌아보았다. 촛대에 밝힌 두 개의 밝은 촛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냐니요? 제가 뭘 알아야쥬. 밖에서 하는 얘기들로는 워낙 시골 서 자란 분이라 농민덜 생각을 많이 한다고도 하고, 또 오래 군인 생활을 혀서 아주 무서븐 사람이라고도 하고.”

선택이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빼어 물었다.

“내가 가만히 보니께 말여. 이 냥반이 보통 사람이 아닌 거 같어. 글고 당신도 라디오로 뉴스 같은 거 좀 많이 들어. 그래야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지.”

“어머니가 밧데리 닳는다고….”

“그 깟 거 얼마나 한다고 그래. 걱정 말고 들으라고.”

라디오는 대청마루에 전용 선반을 만들어서 고이 모셔놓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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