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물①/ 물 보러 가다
[그 시절 우리는] 물①/ 물 보러 가다
  • 이상락 소설가
  • 승인 2015.07.0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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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내가 태어나서 소년기를 보낸 곳은 남서해안의 ‘생일도’라는 작은 섬이다. 요즘이야 섬 지방으로의 여행이 활발하여서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도 도서 주민들의 생활상을 잘 알게 되었지만, 칠팔십년대만 해도 도시의 젊은이들 중엔 ‘섬’이라고 하면 “산꼭대기에서 축구공을 뻥 차면 바다에 뚝 떨어지는…”, 그런 곳으로 아는 이들이 적잖았다. 따라서 ‘섬에서 농사를 지었다’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넉넉한 농토 확보가 어려웠던 섬 주민들일수록 더욱 치열하게 농토를 개간하고 더욱 열심히 농사를 지어야 했다. 생존을 위해서 그리 해야 했다. 내가 태어난 섬은 자연부락을 다섯 개나 거느리고 있는 면(面) 단위의 섬이었으니 “섬마을에서 태어났다면서 옛 농촌 마을의 정서를 어떻게 알지?” 그런 걱정일랑 거두시기를.

‘섬’이라는 말로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했거니와, 바닷가 주민이 아니면 전혀 헷갈릴 필요가 없는 말인데도 헷갈리는 경우가 있었다. 어느 날 오후에 아부지가 나한테 물었다.

“아부지 물 보러 갈 것인디, 너도 같이 갈 것이여?”

내가 싫다 하면 안 따라가도 된다는 얘기다. 이럴 땐 대답을 잘 해야 한다. ‘물을 본다’는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미리 쳐둔 그물에 고기가 들었나 살펴보고 잡힌 물고기를 가져오는 것이 어민으로서의 ‘물 보기’인데, 그것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일이다. 그런데 농민으로서의 ‘물 보기’는 다르다. 어쨌든 나는,

“야, 물 보러 같이 가께라우.”

그렇게 대답을 해버렸는데 아뿔싸, 아부지는 마당에서 어구(漁具)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 삽을 들고 나선다. 낭패다. 아부지가 물 보러 가자는 말은 결국 ‘논에 물 보러 가자’는 얘기였다.

“그란디, 빈손으로 갈라고? 낫이랑 망태랑 챙겨!”

논물 보러 따라 나간 김에 꼴도 한 망태 베어 와야 했으니 역시 순간의 선택을 잘 못 하면 몸뚱이가 괴롭다.

물을 보러 나간 곳은 경사면을 따라서 여러 논배미가 계단식으로 조성돼 있는, 요즘 쓰는 말로 ‘다랑이 논’ 지역이었다. 맨 위쪽에 물이 나오는 웅덩이, 곧 수원지가 있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물을 차례로 받아 가두어 농사를 짓는 것인데, 우리 논은 위에서 세 번째였다. 수로가 따로 없었으므로 윗논의 물을 터주어야 아랫논에서 받을 수 있게 돼 있었다.

아부지는 나를 데리고 일단 다랑이논의 맨 위쪽으로 올라가더니 첫 번째 논의 주인인 춘실이 아부지 이름을 들먹이면서 “천하의 호로자식”이라고 마구 흥분을 하였다. 나는 아부지가 그처럼 무섭게 화를 내는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아래 쪽 논들은 물이 말라서 바닥이 드러날 지경인데 춘실이네 논에서는 물이 넘치고 있었다. 더군다나 물이 차면 아랫논으로 흘려주어야 했으나 논둑의 물꼬를 단단히 막아버린 바람에 옆에 있는 골짜기 쪽으로 물이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부지가 춘실이네 논의 물꼬를 삽으로 트자 아랫논으로 물이 쏟아져 내렸고, 한참 뒤에는 우리 논으로도 물이 들어왔다. 나는 혼잣말로 “춘실이 느그 아부지는 인자 죽었다!” 라고 중얼거렸다. 물꼬를 손보고 난 아부지가 나를 불렀다.

“아부지하고 논둑 조깐 볼르자.”

논둑을 바른다는 것은 바닥의 흙을 손으로 긁어서 논둑 안쪽으로 올려붙여서 마치 콘크리트 미장을 하듯 그렇게 문지르고 다져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물이 허투루 새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부지와 반씩 나눠 맡아 했으나 논둑을 바르는 일은 한참이나 걸렸다.

일을 마치고 나니 목이 말랐으므로 나는 물웅덩이 쪽으로 올라갔다. 엉덩이를 치켜들고 고개를 박은 채 시원한 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런데 고개를 들었을 때 뱀 한 마리가 웅덩이 안 쪽 돌 틈으로 스르륵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언젠가 재식이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물 마실 때 뱀 알이 뱃속으로 들어가면 나중에 뱀 새끼들이 똥구멍을 뚫고 막 나온대.”

으아, 겁이 났다. 나는 다짐하였다.

‘앞으로 논으로는 절대 물 보러 안 올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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