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26회

  • 입력 2015.07.03 13:37
  • 수정 2015.07.03 13:41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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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가 생기고 나서 선택의 집에는 한동안 라디오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들끓었다. 어차피 이장을 맡은 뒤로는 마을 사람들이 자주 찾아왔다. 때 아닌 마을 사랑방처럼 되어 적잖이 귀찮기도 했으나 그 덕분으로 갓 시집온 이성분이 동네 아낙들과 빠르게 가까워지는 계기도 되었다. 선택에게도 라디오는 꽤나 귀중한 물건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오는 뉴스가 있었던 것이다. 주로 정부의 발표 내용 같은 게 많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시골에서는 남보다 훨씬 앞서가는 정보였다. 새로 지은 기와집의 대청마루에 누워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서울 살림이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집을 새로 지어서 좋기는 대궐같이 좋은데 그 돈으로 전답을 사놓는 게 더 낫지 않나도 싶다. 집에서 식량 나오는 것도 아니고.”

▲ 일러스트 박홍규

어머니가 근심 섞인 말을 꺼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집을 지으면서 선택네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긴 했지만 가지고 있는 전답은 다 해야 대여섯 마지기가 다였다. 일 잘하는 삼촌이 남의 땅까지 몇 마지기 더 부쳐도 겨우 식량이나 댈까 말까한 정도였다.

“그럼 논을 좀 장만할까요?”

선택이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말하자 어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먼 돈으로 논을 사? 집 짓는 데도 모자랐다면서.”

“다 생각이 있어요. 글고 조금 기다리면 땅이 막 나올 것이에요.”

선택은 이미 종가의 아재들이 서로 땅을 팔아서 나누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여러 형제들이 땅을 나누어 먹으려 하고 저들이 하는 사업이 시원치 않다니 분명 헐값에 나올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종가가 가진 땅은 워낙 많아서 그 중에 옥답을 골라 몇 뙤기를 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돈은 농협에서 융통하면 될 것이었다. 그리고 박달식에게서 나오는 돈으로 융자금을 갚아나가면 몇 년 지나 고스란히 제 차지가 될 것이었다. 선택은 생각만 해도 잇새에서 신 침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진짜 부자되는 게 별 것도 아니구만, 그래. 이렇게만 가면 돈 걱정, 밥 걱정은 없이 살겄지.’

선택에게 행운이 온 것일까. 하여튼 무슨 일이든 돈이 되어 굴러들어왔다. 박달식이 하는 사업도 날로 번창하여 읍내에 번듯한 가게까지 내고 ‘고향농산’이라는 간판을 엄청나게 크게 해 붙였다.

“어이, 아우님. 그깟 농협 때려치고 나하고 사업이나 허세. 서울에다가도 점방을 하나 내고.” 박달식이 그런 제안을 할 정도였다. 두 사람은 이제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사업이 커지면서 돈을 어지간히 벌었을 텐데도 그는 여전히 농협 자금을 뭉텅이로 쓰고 있었다. 서울에 첩을 두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선택은 묻지 않았다. 어쨌거나 선택의 몫이 더 커져서 매월 이만 원 넘는 월급을 받고 있었다. 그가 농협자금을 쓰며 여러 경로로 뇌물을 주고 장사를 하면서도 이런저런 야바위 짓을 한다는 걸 선택이 손금 보듯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은 크게 하는 일없이 돈을 받으면서도 양심에 거리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그와 사이가 틀어지면 선택 역시 걸릴 만 한 게 꽤 있었다. 결국 서로서로 얽혀 있는 관계였고 둘 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조심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겉으로는 둘도 없는 의리로 뭉친 것처럼 보여도 실은 돈으로 묶인 사이였던 것이다.

“나 내년이면 정직원이 될 거 같아요. 조합장까지 한 번 해보고 나오려고 그러는데요.”

괜한 소리만은 아니었다. 농협 개척원으로 들어갔다가 정직원이 된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여럿이었다. 선택은 학력으로나 농협 업무에 대한 지식으로나 진즉에 정직원이 되었어야 했다. 늦어진 것은 단순히 산동농협의 인사적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은 정직원 채용을 미룰 수 없다는 게 조합장을 위시한 직원들의 중론이었다. 조합장 자리도 하는 걸 보니까 지금 당장 선택이 맡아서 해도 그보다 더 잘 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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