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보리·밀②/ 보리 베는 날
[그 시절 우리는] 보리·밀②/ 보리 베는 날
  • 이상락 소설가
  • 승인 2015.06.12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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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보리서리와 밀서리가 참외서리나 수박서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설익은 것들을 훔쳐 먹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후 두어 시쯤, 동무들과 망태 메고 잔등너머에 꼴 베러 간다. 사실 꼴망태 그것 채우는 것쯤이야 잠깐이면 된다. 그럼에도 일찌감치 나선 것은 집에 있어봤자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따위의 엄니의 잔소리 바가지가 귀찮기 때문이다.

소나무 그늘이 진 널바위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언덕바지 영송이네 밀·보리밭이 눈에 밟힌다. 외진 곳에 덩그러니 위치한 영송이네 밭을 ‘밀·보리밭’이라 한 것은 해마다 밭뙈기를 반으로 나눠서 한쪽은 밀을 심고 한쪽은 보리를 심었기 때문이다.

말이 필요 없었으므로, 우리 셋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는 것으로 사인 교환을 마치고 보급투쟁에 나섰다. 승남이는 밀밭으로, 수길이는 보리밭으로 향하고 그 사이에 나는 마른 소나무 가지를 주워 와서 불을 피웠다.

잠깐 만에 두 녀석은 낫으로 이삭을 잘라서, 마치 요즘 결혼식 할 때 신부가 부케를 움켜쥔 그런 모습으로 한 움큼씩의 밀과 보리를 가져와서는 모닥불에 그슬렸다.

“그라먼 인자 비벼 보끄나.”

까맣게 그을린 보리 이삭 서넛을 손바닥으로 비벼서 후후, 불면 쭉정이는 날아가고 파랗고 보드라운 보리알곡만 남는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다음으로는 밀을 비벼서 입에 털어 넣었다. 하지만 그것 두어 볼때기 먹어봤자 간에 기별도 안 간다.

“한 번 더 갔다 오까?”

승남이가 물었으나 우리 둘은 고개를 저었다. 밭뙈기가 워낙 손바닥만 했으므로 밀·보리 모가지를 너무 많이 잘라버렸다가는 동네 시끄러운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길디긴 해가 기울어서 맞은 편 언덕에 산 그림자가 어릴 무렵 우리는 후다닥 꼴 한 깍지씩을 베어다가 바위 위에 합쳐놓는다. 그러고는 한 사람씩 차례로 흙바닥에 낫을 던진다. 공중으로 던진 낫이 땅에 꽂히면 그 낫 주인이 베어다 놓은 꼴을 차지한다. 낫치기다. 그 짓도 무료해지면 바위에다 풀을 문질러 윷판을 그리고, 나뭇가지를 싹둑 잘라 윷을 가른 다음, 역시 꼴 내기 윷놀이를 한다. 세 녀석의 망태에 꼴이 가득 찰 때에야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운다.

“나, 껌 맹글라고….”

수길이는 한참 전에 불에 그슬려서 한 볼때기 털어 넣었던 밀알을 아직도 오물오물 씹고 있다. 고놈을 삼키지 않고 내내 씹다가 냇물에 밀기울을 흘려보내고 또 씹고 하면 나중에는 껌이 된다는 것이다. 녀석은 수시로 씹던 것을 꺼냈다가는 다시 입에 놓곤 했는데 승남이와 내가 아무리 “던적스런 새끼!”라고 타박을 해도 껌을 만들고 말겠다는 그의 의지는 굳건하기만 하였다.

보리가 익었다. 밀도 익었다. 여기 저기 보리나 밀을 베는 논밭이 늘어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학교에 가야 했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토방마루 한쪽에 꾸려 두었던 책보를 찾는데 어어? 아무리 찾아도 책보가 안 보인다.

“엄니, 내 책보 못 봤어?”

그런데 엄니가 자꾸 눈길을 피한다. 그러면서 엉뚱한 대답을 한다.

“오늘 우리 집 보리 비는 날이다!”

“보리 비는 날인디 뭣이 어쨌다고?”

“오늘 학교 가지 말고 식구대로 보리 비러 가자!”

엄니가 책보를 감춘 것이다. 책보를 내놓으라는 둥, 책보 대신에 낫을 들고 밭으로 가자는 둥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아부지가 큰 기침을 하고 나선다.

“보리를 비는 것은 일 년에 몇 번 없는 우리 집안의 아조 큰 행사여. 그라고 너는 장남으로서 집안의 중대사를 도와줄 의무와 책임이 있는 놈이여. 거그다가 너는 공부를 솔찬히 잘 해서, 학교 하루 빠졌다고 꼴등할 걱정은 절대로 없응께, 마땅히 낫을 들고 보리 비러 가야 돼. 그것이 진짜배기 공부여. 알겄냐?”

나는 더 이상 어쩌지 못 하고 내 몫의 낫을 챙겨 숫돌에 간다. 그때는 참 많이 원망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우리 아부지의 자식에 대한 교육관은 참말로 위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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