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보리·밀①/ 보리밭 사이 길로

  • 입력 2015.06.07 10:11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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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농민들에게 농작물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파종하고, 물주고, 김매고, 거름 주고… 하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자식과 마찬가지가 아니라 바로 자식 그 자체로 대한다는 사실을 실감할 것이다. 어떤 때는 ‘그 자식’을 위하는 마음이 넘쳐서 진짜배기인 ‘이 자식’을 서운하게 만들기도 했다. 남새밭에서 깡통 들고 벌레를 잡는 중에 뒷걸음치다 배추포기라도 밟을라치면 엄니는 “이눔 자석, 넌 올 저슬에 짐치 못 묵을 중 알어!” 하며 엄포를 놓았다.

그런데, 그처럼 아끼는 농작물을 마구 짓밟았는데도 지청구는커녕 칭찬을 받는 때가 있었다. ‘보리밟기’를 할 때였다.

가을에 파종한 보리는 싹이 나서 파리가 반 뼘쯤이나 파랗게 자란 상태에서 겨울을 나게 되는데, 땅이 얼면 표면의 흙이 들떠서 보리가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른 봄철에 겉흙을 밟아 줌으로써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게 하는 작업이 바로 보리밟기다.

대개는 식구들이 나가서 하루 이틀씩 밟았으나 넓은 보리밭을 가진 사람 중에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우리들에게 사탕 하나씩을 물려주고서 보리밭으로 유인하기도 하였다. 제주도에서는 동네의 말들을 도맡아 관리하던 ‘테우리’가 이른 봄이면 수십 마리의 말을 몰고 한라산에서 내려와서 집집마다의 보리밭을 밟아 주었다.

봄이 느지막해지면 이삭이 패기 시작한다. 그 즈음에 우리들은 보릿대궁을 쑥 뽑아 마디 하나를 잘라내어서, 한쪽 끝을 가볍게 잘근잘근 깨문 다음에 입에 물고 불었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ㅡㄹ 닐리리…

한센병을 앓았던 시인 한하운이 어린 시절에 불었다는 바로 그 ‘보리피리’다.

그러나 엄니는, 내가 보리피리나 불면서 한가로이 청보리밭 풍경을 관상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하루는 깜부기 뽑는 일에, 다음 날은 귀리 뽑는 노역에 어린 나를 무시로 징발하였다. 태풍이라도 지나가고 나면 쓰러진 보리를 일으켜 세우는 노역을 또 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는 날씨가 멀쩡했는데도 보리밭 한 쪽이 움푹 팬 모습으로 뭉개져 있었다.

“이런 망할 놈의 짐상들이 보리를 영 못 씨게 맹글어부렀네.”

엄니는 뒷산의 노루가 내려와 우리 보리밭에서 자고 간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었으나, 노루는 동네 가까이에 있는 전답까지는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쯤 나도 알고 있었다.

바로 전 날 어스름 저녁에 마당으로 오줌 누러 나갔다가, 분명 이웃집 순이 누님과 내(川) 건너 사는 상남이 형이 우리 보리밭 둑길로 함께 걸어 들어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틀림없이 그 둘이 보리밭에 들어가 앉아서 ‘아침 바람 찬바람에…’ 하며 쎄쎄쎄를 했을 것이다. 나는 엄니한테 그 사실을 고자질할까말까 망설였는데, 쓰러진 보리를 일으키는 엄니의 얼굴이 여간 화가 난 모습이 아닌 데다, 상남이는 내가 좋아하는 육촌형이었으므로 까짓것, 참아주었다.

그 어스름 저녁에 쎄쎄쎄를 함께 하느라 우리 보리밭 한 쪽을 ‘못 씨게 맹글어부렀던’ 두 사람은 지금은 부산의 부전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며 같이 산다.

정선 아라리의 노랫말 중에 ‘수수밭 삼밭을 다 지내 놓고서 / 빤빤한 잔디밭에서 왜 이렇게 졸라’ 운운하는 대목이 있다. 우리 동네 상남이 형은 그날 저녁에, 삼밭이나 수수밭보다 훨씬 조건이 불리한 보리밭이었을지언정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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