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23회

  • 입력 2015.06.05 13:28
  • 수정 2015.06.05 13:55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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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선택이 박달식을 만난 것은 인생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장삿속이 밝은 사람이었고 계산도 틀림이 없었다. 선택은 그와 동업 아닌 동업을 하면서 농협에서 받는 월급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걱정했던 뒷말도 처음 몇 년 동안은 전혀 없었다.

“그런 일이야말로 농협에서 해야 할 일 아니여? 더구나 우리 정선택 씨가 하는 일이라면 내가 적극적으로 밀어줘야지.”

▲ 일러스트 박홍규

몇 번 박달식에게 술과 밥을 얻어먹은 조합장도 그렇게 말하며 선택을 비호해주었기 때문에 산동면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수집하는 일은 어려울 게 없었다. 읍내에서 오일장이 열리는 날로 정해서 농협 마당에서 일종의 즉석 거래가 이루어졌다. 농민들은 귀동냥으로 읍내에서 이루어지는 농산물의 거래 가격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서울의 시세를 알 리는 없었다. 게다가 읍내의 상인들 역시 그들끼리 가격 담합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그들이 정한 가격 그대로 농산물을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굳이 읍내까지 가지 않더라도 농협 마당에서 상인이 와서 사가면서 값도 비슷하게 쳐주니까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소문이 나서 이웃한 다른 면의 농민들까지 산동면을 찾을 정도가 되었고 박달식의 트럭은 점점 농산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박달식은 운전기사까지 하나 고용하여 점차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 동안에 급전이 필요하게 되면 선택이 농협에서 융통해주었음은 물론이었다.

매월 만 원 정도의 고정 수입에 가끔씩 부수적으로 박달식이 보너스 식으로 건네주는 돈까지 들어오자 선택의 살림살이는 금세 윤기가 돌았다. 그 무렵 종가는 나날이 기울고 있었다. 그 많던 전답이며 재산을 네 아들이 번갈아 들어먹기 시작하더니 해마다 가을이면 도지로 들어오는 쌀을 쌓아두던 커다란 창고가 텅텅 비게 되었다. 멀리 백 리 밖에서도 도지가 들어온다던 전답들이 하나 둘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종가의 두 아들은 광산 사업에 미쳐서 강원도로 경상도로 뛰어다니며 돈을 까먹고 밑의 둘도 서울에서 사업을 한다면서 적잖이 전답을 날린 모양이었다.

“큰집이 영 형편이 안 좋은가 보더라. 어제 큰집 할아버지가 병원에 실려 갔어. 요새 그렇게 낙담을 하시더니 갑자기 쓰러지셨다지, 뭐야. 춘추가 있으니까 일어나기는 틀렸다고들도 허고.”

어머니와 삼촌이 퇴근한 선택과 저녁상을 물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일가붙이라고 도움을 받았으면 받았지 딱히 나쁠 게 없는 관계이지만 선택은 예전부터 종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비슷한 항렬의 집안이면서도 사는 게 너무나 큰 차이가 나는 데서 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육대 조에서 갈라져 나왔다는데 어떻게 한 집은 거부가 되고 다른 집은 겨우 목구멍에 풀칠이나 하는 살림으로 나뉘었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들려준 이야기로는 선택의 고조와 증조부 되는 이들이 첩을 두고 살면서 노상 서울 출입을 하여 요릿집에서 하루 저녁에 전답 하나씩 날려먹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큰집은 알뜰하게 살림을 일궈 부를 쌓았고 선택의 조상들은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거였다. 삼백 리가 넘는 서울로 요리를 먹으러 다녔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지만 어딘지 과거의 영화를 부풀리는 것 같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좀체 믿기 어려웠다.

하여튼 그러저러한 이유로 선택에게 종가는 주눅이 들게 하면서도 알 수 없는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곤 하는 존재였다.

“부자가 삼대 안 간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 집 아재들 그 나이에 대학까지 나왔다고들 하더니 결국 집안을 그 모양으로 만드는구만요.”

선택의 말이 야멸치게 들렸는지 어머니와 삼촌이 동시에 선택을 돌아보았다.

“그 집 운이 다 했는지도 모르지요. 근데 그 집 아재들이 곧 죽어도 시골로 내려올 리는 없을 텐데 큰집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그 커다란 집엔 누가 산대요?”

“아서. 암만 그래도 우리 집안 종간데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삼촌이 큰 눈을 끔뻑거리며 곰방대를 피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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