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고구마③/ 생고구마를 씹으며 「혁명공약」을 외우다

  • 입력 2015.05.29 16:51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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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고구마만큼 제 온몸을 사람한테 다 바치는 식물도 드물 터이다. 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쯤이면 엄니는 어린 나를 데리고 가서 아예 하루 종일 고구마 밭에서 살았다. 고구마 줄기를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엄니한테는 그 일이 절실했는지 몰라도 어린 나에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어서 금세 싫증이 났다. 괜히 밭고랑의 돌멩이를 집어서 기어가는 고구마벌레에게 일격을 가하는 해찰을 부렸다. 이런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징그럽게 몸뚱이는 푸르뎅뎅하고, 기분 나쁘게 머리에 뿔까지 나갖고…너는 내 손에 죽어야 쓰겄어, 얍!”

고구마줄기가 사람들의 맛난 반찬거리였다면 고구마를 캘 때 걷어내는 억센 덩굴은 겨울철 쇠죽을 쑬 때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소의 양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알코올의 주정으로 쓰기 위하여 공출을 했던 절간고구마(얇게 썰어서 말린 고구마)는 농한기의 빈한한 가정에 용돈 걱정을 덜어주는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고구마는 우리를 궁핍으로부터 구해준 글자 그대로 구황(救荒) 작물이었지만 우리는 늦가을부터 시작되는, 고구마를 주식 삼아서 먹어야 되는 그 ‘시즌’이 참말 싫었다. 그래서 엉뚱한 데에다 화풀이를 했다. 안방의 문짝에는 열두 달이 한 장에 모두 들어있는 달력이 붙어 있었는데, 동생 녀석들이 그 달력 속의 정치인 얼굴에서 두 눈 부분을 찢어내고는 거기에다 고구마 껍질을 덕지덕지 붙여 놓았다. 우리는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깔깔거렸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나눠준 달력 속, 키 작은 사내의 라이방에도 물고구마의 살덩어리를 짓이겨 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달력 속에 있는 바로 그 국회의원이 지역 시찰 중에 우리 마을에 왔다. 이장집이어서 우리 집부터 먼저 들른 것인데, 안방에서 아버지와 함께 막걸리를 마시던 국회의원이 문제의 사진을 그 보았겠다, 흐음…. 그 다음 일은 생략하기로 한다.

“오늘 종례 때까지 이거 다 못 외운 사람은 집에 안 보내줄 것잉께 그리 알어라, 잉!”

선생님이 말했다. 교실에 붙여놓은 <혁명공약>은 그 내용이 온통 어려운 말 투성이였는데 여섯 가지나 되는 그것을 국민학생들에게 외우라고 한 것은 그야말로 소에게 경을 외라 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아랫마을에 있었던 탓에 바닷가를 따라 나 있는 길을 걸어서 통학하였다. 1.5 킬로미터 가량의 짧은 거리였으므로, 4교시가 끝나면 우리는 아예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다시 학교에 가서 오후수업을 받곤 했다.

“우리, 오늘은 집에 가지 말고, 여그서 혁명공약이나 외우자.”

집에 가서 식은 보리밥 한 그릇 먹어봤자 돌아오는 길에 다 꺼질 것이니, 아예 길가에 있는 아랫마을 진남이네 고구마 밭에서 한 뿌리씩 캐서 점심을 때우자고 작당한 것이다. 우리는 밭으로 들어가서 고구마 두어 뿌리씩을 후다닥 캔 다음 재빨리 현장을 수습하였다. 인근 냇가로 내려가 깨끗이 씻은 다음, 생고구마를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맛이 그만이었다. 먹으면서 우리는 <혁명공약>을 ‘논(論)’하였다.

“반공을 국시의 제 일의로 삼고…이거이 뭔 소린지 몰르겄어.”

“나는 그것 말고도 전부 다 몰르겄는디.”

“아하, 알겄다! 토요일을 반공일이라고 안 하드라고. 그랑께 ‘반공일날은 국시를 제일 몬침 삶어 묵어라’, 그 소리 아니겄어?”

“그라먼, 네 번째에 있는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는 뭣인디?”

“그걸 내가 어치케 알겄냐!”

우리는 그날 이후로 점심시간에 집에까지 올라가지 않고 도중에 진남이네 고구마 밭에서 생고구마를 캐먹었다. 어느 날, 5교시 시작종이 울리자마자 교장 전생님이 화가 잔뜩 난 얼굴을 하고 우리 교실에 들어와서 말했다.

“웃마을에 사는 머스마 놈들, 전부 앞으로 나와서 손바닥 내밀어!”

나는 그때에야 손바닥을 마구 비벼봤지만, 여기저기 얼룩진 검은 고구마 진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 날 손바닥을 열일곱 대나 맞았다. 아, 민생고를 해결하는 길은 힘들고도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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