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22회
[소설] 제3장 어떤 세월 22회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5.05.29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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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수가 소개해 준 사람은 선택보다 네 살이 위인 박달식이란 자였다. 정해수와는 처가 쪽으로 연이 닿아 처조카뻘이 되는 모양이었다. 넙데데한 검은 얼굴에 덩치가 좋아서 천생 농사꾼으로 보이는 상판인데 눈만은 가늘게 찢어져서 어딘지 영리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그는 선택을 만나자마자 오랜 지기나 되는 듯이 걸걸한 목소리로 반색을 했다.

“정 주사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죠. 내가 아저씨한테 진즉에 만나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제야 소개를 해주네요, 글쎄.”

▲ 일러스트 박홍규

덥석 잡는 두 손이 꽤나 억세었다. 정해수까지 끼어 세 사람이 청요리 집으로 들어가 독한 술잔을 돌렸다. 대충 들어본 사업의 내용은 짐작한 것과 비슷했다.

사실 농민들은 생산한 농산물을 판매하는 데 있어서는 깜깜이었다. 아무리 목구멍에 풀칠만 하는 생활이라도 곰비임비 돈이 들어가는 일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 때마다 광에 쟁여놓았던 콩이며 들깨, 보리쌀 따위를 들어내야 고린 동전이나마 만져볼 수 있었다. 지게에 지거나 보따리에 이고 삼십 리 넘는 읍내까지 가서 돈으로 바꾸는 것인데 시세를 가늠할 길이 없어 몇몇 상인들이 담합으로 정한 가격에 속절없이 넘기고 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저울의 눈을 속이거나 됫박질 농간 또한 자심해서 농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넘기고 오면 으레 입맛이 쓰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느 날 어느 시에 산동 농협으로 농산물 수집을 하러 간다는 걸 정주사님이 농민들에게 널리 알려주시고, 또 에, 잘 알잖습니까? 솔직히 장사꾼들이 농간 부리는 게 한 두 가지입니까? 그러니까 우리 고향농산에서는 절대 농민들을 속이지 않고 값을 한 푼이라도 더 쳐준다, 이렇게 농민들한테 홍보를 해달라는 것입죠. 저는 아무리 얘기해도 장사꾼 얘기밖에 안 되지만 정 주사님같이 지역 농민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계신 분이 잘 이야기해주면 다들 믿고 거래를 하지 않겄습니까. 거기다가 또 조합에서 하는 거라면 농민들한테 더 믿음을 줄 테지요.”

박달식이 타고 온 트럭에는 하얀 페인트로 ‘고향농산’이라는 글씨가 비뚤비뚤 쓰여 있었다. 곰곰이 그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산동면 구석구석까지 발품을 팔고 다니며 인맥을 만들어 놓은 데다 선택의 말이라면 무턱대고 따르는 젊은이들이 꽤 여럿이었다. 그 정도 소문을 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고 듣고 보니 농민들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는 일이다 싶었다. 다만 농협이 나서서 하는 일이라고 하면 나중에 뒤탈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대충은 알아듣겠는데요, 어쨌든 박 사장님이 개인적으로 하는 사업인데 농협에서 공식적으로 도와주는 식으로 해서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조심스럽게 선택이 의견을 말하자 박달식이 볼멘소리를 했다.

“사실 농민들한테도 이익인데 말입죠. 하루 품 들여서 읍내까지 와서 그것도 제값 못 받는 게 다반산데 가만히 앉아서 팔면 그만해도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농협에서 나서서 한다고 해도 칭찬받으면 받았지, 잘못하는 일은 아니쥬. 안 그래요, 아저씨?”

그가 정해수를 향해 동의를 구하자 정해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야, 그건 정주사 말이 맞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뒷말이 나오면 될 일도 안 되는 것이여. 농협은 장마당이나 펼쳐주는 것으로 하고 장사는 철저하게 달식이 네가 개인적으로 하는 것으로 해. 산동면에서는 정주사 말이 조합장 말보다 더 먹히니까 정주사만 도와주면 만사형통이다. 급전 필요할 때도 정주사가 도와줄 거고. 그러니까 정주사 섭섭지 않게 잘 대우해 줘야 돼.”

“그야 여부가 있습니까요. 내 아주 정주사하고 동업하는 마음으로 하겄습니다.”

박달식이 과장되게 웃으며 양복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원래 월급은 선불로 주는 게 기분 좋은 거 아닙니까요? 첫 달 월급이라 생각하시고 받아두세요.”

엉겁결에 동업이니 월급이니 하는 말이 나오고 봉투까지 쥐어주자 선택은 조금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마구 일이 진행되어도 되는지, 무언가 함정에 빠지는 건 아닌지 생각을 갈피 잡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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