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라면 먹고 갈래요?

  • 입력 2015.05.29 15:25
  • 수정 2015.05.29 15:30
  • 기자명 정은정 <대한민국치킨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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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은정 <대한민국치킨전> 저자

“엄마, 제발 라면만 넣어. 라면만!”

우리 엄마는 새참 라면을 끓일 때 마다 라면 냄비 속으로 국수 한 줌을 휙 던져 놓곤 하셨다. 튀김인 라면과 건조식품인 소면은 만나면 그 물성이 달라서 곤죽이 되어 버리곤 했고, 나는 늘 질색을 했다. 그까짓 라면이 얼마나 한다고 국수를 집어넣느냐며 떼를 쓰기도 했지만 별무소용. 라면 스프가 아깝다며 잘 쟁여뒀다가 국수만 넣어서 삶아 드시기도 하셨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도망가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철마다 끌려가서(?) 김을 매고 토마토를 따던 시절. 손쉽게 한 끼 때우기에 좋은 것은 늘 라면, 아니 ‘라면 국수’였다.

20년 전 자기 집 일 내팽개치고 남의 집 일 간다고 야단을 맞으면서도 친구들과 놀 생각에 농활을 들어갔다. 그때 서울내기 친구들은 새참으로 찐 감자가 나오는 ‘전원일기’의 풍경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농사꾼 딸은 알고 있었다. 빵과 우유, 초코파이와 됫병들이 탄산음료가 나올 텐데, 제발 시원하기나 했음 싶었다. 이미 농촌에서는 ‘들밥’을 주문해서 먹거나 짜장면 배달 오토바이가 들판을 누비고 다닌지 오래다. 모든 것이 현금으로 짓는 농사이니 밥 하러 들어갈 시간도 없이 엄마, 형수들은 현금으로 나가는 품이 아까워서라도 들일에 함께 매달려야 한다.

쌀과 김치 먹던 민족 이야기도 이제 옛말. 쌀 소비량은 점점 떨어지기만 하고 거기에 밥쌀 까지 수입을 하는 마당인데, 한국은 세계에서 라면을 가장 많이 먹는 나라다. 1년에 한 사람이 80㎏ 쌀 한가마니 먹지 못하는 나라인데, 라면은 1인당 80개쯤 먹는 나라. 그렇다면 우리가 쌀의 민족일까 라면의 민족일까.

도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농촌 현장에 들어가면 외람되지만 부엌을 곁눈질로 훔쳐보곤 한다. 그럼 ‘차단스’에 잔뜩 쟁여놓은 라면과 믹스커피를 볼 수 있다. 도시처럼 동네에 슈퍼마켓이 가깝지 않으니, 기회가 되면 한꺼번에 많이 사다 두시는 모양이다. 농촌 어르신들도 그냥저냥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적지 않다. 지역 농촌에 가면 부러 ‘하나로마트’에 간다. 충남에는 강원도 감자가 와 있고, 강원도에는 경기도 쌈채소가 와있질 않나 뒤죽박죽이다. 어설프게 로컬푸드 코너라도 만들어져 있는 곳에는 그나마 지역 농산물이 한켠을 차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중앙물류를 하는 이마트나 하나로마트나 도찐개찐. 외려 지역 생산물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가공식품과 공산품이다. 죄다 대기업들에서 생산된 것들이 삼천리 방방골골 차지하고 있으니 잡숫고 사시는 것도 다 고만고만한 듯하다. 읍내 조그만 틈바구니에도 어김없이 다국적기업이 대부분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편의점들이 있고, 거기에 조무래기 청소년들이 컵라면과 음료수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곤 하면 마음이 울적하다. 농촌에 들어가서 가장 많이 대접 받는 음료수도 단연코 믹스커피다. 한두 잔씩 여러 집에 들러 얻어 마시다 보면 배가 불러오고 그날 밤 잠은 다 잤다 싶어진다.

어디 라면과 믹스커피일 뿐이랴. 음식의 발원지인 농촌 밥상은 오래전부터 이미 글로벌식품 기업들의 그늘이 짙다. 쌀을 팔아 돈을 사고, 그 돈으로 라면을 산다. “라면 먹고 갈래요?”란 소리는 젊은 연인들의 객쩍은 영화 대사만이 아닌 시절이다. 농촌 들녘에서 이미 ‘라면’ 먹고 가란 소리를 들은 지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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