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고구마①/ 고구마가 싫었다!

  • 입력 2015.05.17 22:46
  • 수정 2015.05.17 22:55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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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건강, 혹은 식도락 관련 TV 프로그램들이 안방을 장악하면서 이제 세상의 모든 먹을거리들은 실험실의 비커에 담긴 채 성분이며 영양소며 열량이며 인체의 오장육부에 미치는 영향이며… 그 정체를 낱낱이 해부당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으뜸가는 얘깃거리는, 영양과잉의 시대에 그 먹을거리가 이른바 ‘웰빙’에 도움이 되느냐의 여부다. ‘배부르면 장땡’이라는 개발연대 식 사고를 아직 말끔히 털어내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겐 조금은 당황스런 세태다.

그런데, 내가 아주 싫어하는 먹을거리 중에서, 근래 들어 「우리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탄수화물, 비타민, 미네랄 등의 영양성분이 균형 있게 들어 있는 ‘준완전식품’」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놈이 있다. 고구마다. 이런, 참…. 내겐 가히, 천대했던 아랫것이 어느 날 급제해서 능소화 나풀거리는 관을 쓴 채 가마타고 앞에 나타난 꼴이다.

함께 사는 장모님이나 아내는 고구마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따라서 우리 집 주방엔 매일이다시피 삶은 고구마가 식탁에 놓여 있지만 나는 녀석에게 거의 손을 대지 않는다.

나는 고구마가 싫다. 지금도 싫지만 예전에도 싫었다. 그러나 ‘고구마는 나의 기호식품’이라고 말하는 어느 누구 못지않게 많은 고구마를 먹었다. 나는 소년기에 이미 보통 사람들이 평생 먹을 고구마의 총량을 이미 섭취해 버렸다.

어머니가 아침밥을 차리려고 솥뚜껑을 젖혀 연다. 피어오르던 김이 걷히면, 껍질을 벗겨낸 고구마 조각들이 노릇노릇하게 잘 익어서 밥 위에 포진하고 있다. 어머니가 주걱으로 그 ‘고구마의 섬들’을 피해서 맨밥 한 그릇을 떠 담는다. 아버지의 밥이다. 그러고는 아니나 다를까, 주걱으로 고구마를 사정 두지 않고 으깨어서 밥하고 뒤죽박죽 섞어버린다. 실망천만이다.

“에이, 오늘 아침에도 고놈의 감재밥을 또 묵게 생게부렀네.”

꽁보리밥이든 반지기 밥이든 나는 고구마가 섞이지 않은 ‘그냥 밥’을 먹는 것을 소원하였다. 말하자면 끼니때마다 밥상에서 ‘감자밥’을 만나지 않는 것이 소망이었는데 나의 그런 소망은 번번이 무너졌다. 내가 살던 남녘 그 지방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 불렀다. 고향을 배경으로 한 이청준의 일련의 작품들에도 고구마는 ‘감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나중에 외지에서 진짜 감자가 들어왔을 때에도 고구마는 ‘감자’의 명패를 여전히 유지한 채, 새로 들어온 그 감자는 북쪽에서 온 감자라 해서 ‘북감자’라고도 했고 여름철에 수확한다 해서 ‘하지감자’라고도 불렀다.

그나마 아침하고 저녁은 나은 편이다. 점심때에는 그냥 고구마 양푼과 김치 그릇만을 놓고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중학을 다니기 위하여 윗녘으로 나왔을 때 나는 비로소 고구마가 섞이지 않은 밥그릇을 대하고서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만일 그때 고구마마저 없었더라면…’에 생각이 미치면, 지금 삶은 고구마를 놓고 진저리치는 내 자신이 조금은, 아니 참 많이 죄스러워진다.

전라도의 남부 지방 특히 해안지역에서, 흉년 기근에 백성을 구제하는 구황(救荒) 작물로서 고구마가 각광을 받은 것은 조선 정조 때였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8년 12월 25일치 기사를 보면, 호남지역에 가뭄이 심해서 백성을 위무하기 위해 현지에 파견된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 서영보가 정조 임금에게 장문의 보고서를 올리는데, 그는 구휼(救恤)의 방편으로 고구마 파종을 강력히 청하고 있다.

“연해 지방 고을에는 이른바 고구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구마는, 명나라의 서광계(徐光啓)가 찬술한 <농정전서(農政全書)>에 처음 보이는데 ‘그것은 조금 심어도 수확이 많고,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가뭄이나 황충에도 재해를 입지 않고, 달고 맛있기가 오곡과 같으며, 힘을 들이는 만큼 보람이 있으므로 풍년이든 흉년이든 간에 이롭다’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30년여 년 동안 남쪽의 연해 지역 백성들은 서로 전하여 심은 자들이 있었으나…”

서영보는 장차 고구마 파종을 대대적으로 장려하여, 고구마 심는 일이 백성들의 풍속으로 자리 잡게 되면, 고구마는 온 나라 사람들에게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처럼 혜택을 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바로 그 남해안의 섬마을에서 태어난 내가 소년시절을 온통 볼따구니에 고구마 부스러기를 바른 채로 지냈던 데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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