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19회

  • 입력 2015.05.08 10:40
  • 수정 2015.05.08 11:32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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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 변한 것이 그 즈음부터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농촌운동에 대한 생각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우선 자신의 가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벗어나고 싶다고 해서 당장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농토라야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이고 선택의 월급 또한 이리저리 다니는 발품에도 빠듯한 지경이었다. 정식 직원이 아닌 개척원이었지만 선택은 최고의 농협 직원이었다. 불과 1년도 되지 않아서 선택은 농협이 하는 일을 완전히 파악했을 뿐 아니라 실무적인 면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특히 지역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울의 권순천에게 청을 넣어 해결하기도 해서 농협 내에서는 선택은 이미 정식 직원 이상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향응이 이루어지는 자리에는 선택도 동참하게 되었고 예의 일가붙이인 정해수와도 꽤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내가 진작 챙겼어야 하는데 젊은 아재가 그리 어려운 줄은 몰랐네. 하여간 내가 좀 더 알아봄세.”

어느 술자리에서 선택이 푸념 비슷하게 처지를 이야기하자 정해수가 미안하다는 말까지 곁들이며 선택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술을 마시고 함께 노래를 하면서도 선택은 어딘지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어쨌든 그에게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태 파악에 빠른 그는 이미 산동농협에서 선택이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주로 대출 관련해서 선택을 찾았다. 담당 직원이 있긴 했지만 정해수처럼 큰돈을 거래하는 사람은 직원들 다수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었다. 정해수는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농어촌 고리채 정리도, 화폐개혁도 그에게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반대로 얘기하면 농민들이 그런 법에 별 혜택을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었다. 혜택은커녕 고리채 탕감 이후에 농민들은 더욱 비싼 이자를 물어가며 또 다른 빚을 내야 했다. 정부와 농협이 주겠다고 했던 영농자금은 워낙 적었고 그나마 자격을 따졌기 때문에 그 문턱을 넘을 수 있는 농민은 극소수였던 것이다.

▲ 일러스트 박홍규

그 날 정해수는 선택의 주머니에 봉투 하나를 찔러 주었다.

“고기라도 한 칼 끊어가지고 가셔. 거기 큰집 아재 만나면 한 번 들르라고 허고.”

정해수가 말한 큰집 아재는 종가의 둘째, 그러니까 선택에게는 십촌 뻘되는 이였다. 그와 정해수는 읍내 농업고등학교 동기라고 했다. 엉겁결에 그러마고 인사를 하고 헤어져 오면서 선택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몹시 가슴이 뛰었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금품이었다. 딱히 어떤 부탁을 하며 준 건 아니지만 그가 선택에게 돈을 주었다면 그 돈의 성격은 빤한 것이었다. 봉투 안에는 천원 권 열 장이 들어 있었다. 쌀 세 가마 값이었다. 고기 한 칼이 아닌 한 달 월급이 넘는 큰돈이어서 더럭 겁이 났다. 이미 정해수에게 얻어먹은 술이며 밥만 해도 그에게 약점이 잡혔다고 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선택이 묘숙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해우채까지도 부담했던 것이다. 그게 이미 서너 차례였다. 선택은 그렇게 가끔 묘숙을 찾으면서도 처음에 품었던 마음이 조금씩 사라져갔다. 기생이라는 신분을 진정으로 좋아할 수는 없었다. 다만 술자리 끝에 몇 차례 찾았던 것이다. 얼마가 되는지는 몰라도 혹 정해수와 사이가 틀어져 문제를 삼으려 한다면 큰 일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게다가 만 원이라는 거액까지 받았으니 꼼짝없이 그와 엮이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입맛이 쓰면서도 큰돈을 척척 내어주고 날마다 주지육림 속에 사는 정해수가 귀인처럼 느껴지는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속마음이었다. 때로는 별 수 없이 비리나 저지르는 토호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촌수로 조카 뻘인 그에게 굽실거리는 자신을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돈의 힘이었고 선택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돈이었다. 혼기가 꽉 찬 선택에게 혼처를 찾는 어머니와 삼촌의 걱정도 역시 돈이었다. 선택도 결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행처럼 연애결혼이 퍼지고 있었지만 딱히 마음에 둔 처자도 없는데다 연애를 할 염을 내지 못하는 선택에게 드문드문 매파가 찾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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