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18회

  • 입력 2015.05.03 12:34
  • 수정 2015.05.03 12:38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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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선택은 처음으로 여자와 동침을 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진 선택이 깨어난 것은 새벽이 멀지않은 한밤중이었다. 술이 덜 깬 상태였지만 낯선 이불과 옆에 누운 사람의 존재를 알고 놀라서 일어났던 것이다.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오고갔다. 희미한 달빛에 눈이 익자 속곳만 걸치고 옆에서 잠들어 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술자리에서 자신의 짝이었던 묘숙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 여자와 잠자리까지 하게 되었는지, 함께 왔던 일행들은 어찌되었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 일로 크게 꼬투리를 잡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도 밀려왔다. 어쩌다 이런 실수를 하게 되었는지 땅에 머리를 찧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다시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에 점점 맑아져왔다. 그러면서 연신 가슴이 쿵덕거렸다.

▲ 일러스트 박홍규

잠든 묘숙이 가볍게 내뿜는 숨결이 연속적으로 목덜미를 간질였다. 어딘지 끝 모를 땅속으로 꺼지는 것 같은 아뜩한 느낌과 함께 참을 수 없는 욕정이 일어났다. 광목으로 지은 속곳만 입은 선택은 거의 알몸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 선택은 묘숙을 와락 껴안고 말았다. 도무지 접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가끔 속으로만 상상했던 여자의 몸, 몰캉하고 부드러운 맨살의 여자를 껴안자 광포한 힘이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아이, 벌써 깨셨어요? 좀 더 주무시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묘숙은 선택을 마주 껴안았다. 힘을 풀면 꺼질세라 온힘을 다해 껴안고 있는 선택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아이고, 숨 막혀 죽겠네. 팔 좀 풀어봐요. 밤새 이렇게 안고만 있을 거 아니면.”

달빛 속에서 묘숙이 배시시 웃는 모습이 보였다. 선택은 정신없이 그녀의 입술을 찾아 부비고 핥았다. 마침내 알몸이 된 두 남녀가 이리 얽히고 저리 엮이며 합궁을 하게 되었다. 처음인 선택을 능숙하게 묘숙이 이끌어주었고 이미 터질듯 부풀어 오른 선택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방정하였다.

선택은 창이 희미하게 밝아오자마자 방을 나섰다. 묘숙은 코까지 골며 잠이 들었고 선택이 나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선택이 묵은 방은 술청 뒤에 길게 딸린 몇 개의 방 중 하나였다. 어쩌면 다른 방들에 어제 함께 마신 동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마치 몹쓸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선택은 빠른 걸음으로 시곡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삼십 리가 넘는 길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와 삼촌이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연락도 없이 밤을 지내고 온 아들이 걱정되어 어머니는 밤을 꼬박 새웠다고 했다. 연락을 할 도리가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잘 혔네. 이제 우리 조카도 어엿한 공무원인데 그런 자리도 가봐야지. 술이나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읍내에서 직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자고 왔다는 대충의 자초지종을 듣고 삼촌이 수저를 들어 선택에게 건넸다. 삼촌과 선택이 겸상을 하고 어머니와 작은어머니, 그리고 이제 밥술을 넘기기 시작한 어린 조카가 따로 상에 앉았다. 타작한 지 얼마 안 된 보리밥인데 선택의 밥그릇에만 드문드문 쌀이 섞였다. 찬이라고는 시커먼 된장국에 나물 한 보시기가 다였다. 어젯밤에 먹은 진수성찬이 떠올라서였을까, 선택은 처음으로 밥상을 놓고 입이 쓰다고 느꼈다.

“왜? 입맛이 없어? 오늘 또 나갈려면 든든이 먹어야지. 가만 있자, 달구 새끼가 오늘 알을 안 낳았나? 그거라도 가지고 올까?”

삼촌이 이틀 걸러 하나씩 낳는 암탉의 알을 가지러 가려는 걸 손사래를 쳐서 주저앉혔다. 공연히 선택의 눈치를 보느라 어머니도 수저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게 보였다. 그 와중에 어린 조카는 제비처럼 입을 벌리고 밥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선택은 갑자기 이 모든 것에 대해 누구에겐지 모를 부아가 치밀었다. 누구는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린 산해진미를 받는데 우리는 왜 하루 세 끼 시커먼 보리밥에 목을 매는지. 선택은 숟가락을 놓고 마당에서 찬물을 받아 머리를 감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이 가난에서 벗어나고 말 테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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