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소(牛)②/ 코뚜레를 꿰다

  • 입력 2015.05.02 09:38
  • 수정 2015.05.02 09:39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상락 소설가
사춘기를 일컬어 질풍노도의 시기라 한다. 표현만 다를 뿐 마소(馬牛)에게도 그러한 성장단계가 있다. ‘고삐 풀린 망아지’는 말(馬)의 사춘기와 관련된 말이고, ‘못 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 라는 말은 질풍노도시기의 소의 일탈을 일컫는 속담이다.

아버지가 ‘배냇소’로 들여온 그 송아지 녀석 때문에 나는 감히 나의 사춘기를 누릴 엄두를 내지 못 하였다. 일단 녀석을 몰고 동네를 벗어나면 논밭 사이로 난 좁은 들길을 얼마쯤 지나야 뒷산 둔덕에 이르는데, 그 논밭두렁 사잇길을 무사히 지나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다. 잠깐 한 눈 파는 사이에 녀석이 모가지를 전답 쪽으로 돌려서 막 패기 시작한 남의 집 보리나 벼이삭 한 움큼을 날름 뽑아 물고 주전부리를 하는 것쯤이야 차라리 애교에 속한다. 여차 하면 낮은 돌담을 넘어 논밭으로 뛰어들기 일쑤였다.

“야, 이눔 자식! 거기 서!”

어떻게든 녀석을 끌어내려고 고삐를 쥔 채로 정신없이 끌려가다 보면 가시덤불에 긁히고 돌부리에 정강이가 깨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나마 내가 고삐를 잡고 이동 중일 때에야 그래도 어떻게든 금세 송아지를 끌어낼 수 있어서 남의 집 전답에 입힌 피해가 크지 않았다.

뒷산 둔덕에 이르러 소가 평화롭게 풀을 뜯기 시작하면, 이웃집 재갑이와 나는 안심하고 고삐를 놓아둔 채 산딸기를 따먹는 등 딴전을 피운다. 그런데 한참 만에 고개를 들어보니 아뿔싸, 재갑이네 암소는 소나무에 등을 부비고 있는데 우리 집 송아지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소 어디 갔지?”

잃어버린 송아지의 행방을 몰라 허둥대고 있는데 재갑이가 손가락질을 한다.

“야, 저 쪽 용희 즈그 보리밭에 들어가서 막 뛰 댕기고 있네. 용희 아부지 겁나게 무서운디 인자 넌 큰일 났다!”

송아지를 잡으러 내달린다. 녀석은 잡히지 않으려고 그야말로 ‘불난 강변에 덴 소 날뛰듯’ 좌충우돌 내닫는다, 그 바람에 용희네 보리밭은 엉망이 된다. 그날 밤 용희 아버지가 집으로 찾아오고…나는 아버지로부터 된통 지청구 세례를 당한다. 어떨 땐 어머니와 내가 남의 집 논에 가서, 우리 집 송아지 녀석이 망가뜨려놓은 벼 포기를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웬 일인지 우리 집 외양간 입구에 어른들 두세 명이 모여 있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송아지를 잡아먹으려고? 그런데 아니었다.

“너는 저 쪽에 가 있거라. 오늘 손 없는 날이라 코를 뚫기로 했다.”

아버지가 문설주에 걸어두었던 코뚜레를 벗겨들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러고 보니 물푸레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다듬은 다음, 그것을 타원형으로 휘어 묶어서 벽에 걸어둔 지가 한 달이나 되었다.

이윽고 어른들이 송아지의 모가지와 몸통을 붙잡고 달싹 못 하게 하더니, 마당가 모닥불에서 달군 꼬챙이를 꺼내다가 송아지의 코청에 구멍을 내었다. “음매에!”, 송아지가 짧은 비명을 질렀고 아주 조금 피가 나왔다. 어른들은 보지 말라고 했으나 나는 일부러 들여다보았다. 녀석이 그 동안 속 썩인 생각을 하니 그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꼬챙이를 녀석의 코청에 갖다 댈 때 두 눈을 질끈 감기는 했다. 다듬어 말린 물푸레나무의 한 쪽 끝을 밀어 넣어 뚫린 콧구멍에 꿸 때 송아지가 또 한 번 울었다.

“인자 상처 아물면 메칠 뒤부텀 코뚜레에 고삐를 묶어줄 것이여. 그라먼 인자 요놈이, 저 하고자픈 대로 해찰 안 부리고, 말을 아주 잘 들을 것이여. 왜냐고? 코뚜레를 하고나면 그때 부텀서는 송아지가 아닝께 그라제. 기냥 소여, 소. 어른이 되는 것이랑께.”

아마도 아버지가 한 얘기는 사실일 것이었다, 그러나 난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부지는 어른 된 지가 언젠디 엄니 말을 그렇게 안 들어?’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