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17회

  • 입력 2015.04.25 22:59
  • 수정 2015.04.25 23:01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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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는 역시 대출에 대한 향응이었다. 아무도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는 눈치로 알 수 있었다. 선택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은 왜 읍내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정해수가 산동면 농협에서 대출을 받았느냐는 것이었다. 읍내 농협이 훨씬 규모가 크니까 대출도 더 쉬울 터였다. 선택은 박서기를 따라 나가 소피를 보고 돌아오며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저 양반은 읍내 농협에서 돈을 빌어도 될 텐데 어떻게 해서 우리 농협하고 거래를 한 대요?”

▲ 일러스트 박홍규

박은 약간 흠칫하는 눈치더니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췄다.

“이 사람아, 돈이라는 건 많을수록 더 이문을 남기는 것이여. 저 자가 읍내 농협에서는 안 빌렸겠나? 끌어댈 수 있는 데서는 다 끌어대는 거지.” 아직 그런 물정에 어두운 선택으로서는 다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저 이는 본래 돈이 많다고 소문난 사람이잖아요? 왜 이자 물어가며 그렇게 대출을 받는 건데요?”

박서기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아, 지금 시중 금리가 어떤지 몰라? 빚을 내자면 아무리 헐해도 연 삼 할이 넘어. 근데 일할 이부로 농협에서 대출을 받으면 앉은 자리에서 곱이 넘는 이문을 챙기는 거잖아. 세상에 가만히 앉아서 돈이 돈을 벌어오는 게 바로 농협 대출이여.”

그러더니 담배를 하나 빼어 물고 큰 비밀이라도 가르쳐 주는 양 귀에 바싹 대고 속삭였다.

“저 사람이 양조장이나 고무신 장사로 돈을 버는 줄 아는가? 저 사람 아버지 때부터 읍내에서 장리 놓는 걸로 돈을 긁은 집이여. 지금은 아예 저기 도청소재지까지 뻗쳐 있다더구만.”

일테면 고리대금업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더욱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사정부는 변란이 성공하자마자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을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연 이 할이 넘는 채무를 고리채로 규정하여 그 이상은 변제 의무가 없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내용이 복잡하여 농민들은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고 제대로 신고가 되지 않아서 주로 농협과 관이 나서서 대상이나 규모 등을 파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실제로 개인들 간의 채무는 심한 경우 연 십 할의 이자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고리채의 악순환이 농촌을 피폐하게 만드는 주범임은 분명했다. 그런데 박서기의 말에 따르자면 정해수야말로 그런 고리채의 주범이 아닌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는 것 같았다. 서슬 퍼런 군사정부가 강력하게 시행하는 고리채 정리 사업의 시행자라고 할 수 있는 농협 직원이 멀쩡하게 고리대금업자와 술을 마시고 또 대출을 해준다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세상 속이었다.

“뭘 그리 생각해? 우리 개척원이 아직 사회 초년생이라 궁금한 게 많구만. 내 나중에 이야기해 줄 테니까 오늘은 실컷 술이나 마시라구.”

술자리는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술잔이 빠르게 돌고 여자들이 노래를 불렀다. 선택 옆에 앉은 묘숙이란 여자가 한창 유행하는 노래인 노란 샤쓰 사나이를 불렀다. 선택도 어디선가 한두 차례 들어본 노래였는데 사내들은 신이 나서 따라 불렀고 장해수는 제 옆에 앉은 여자를 일으켜 부둥켜안고 춤을 추었다.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어색하고 얼굴이 화끈거려 선택은 앞에 있는 술잔만 비워댔다.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기는 처음이었다.

“저도 한 잔 주시어요.”

노래를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 묘숙이 냉큼 잔을 내밀었다. 얼굴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처음보다 훨씬 어여뻐 보였다. 물론 술기운이 올라서 더욱 그렇게 보였을 것이었다. 선택이 두 손으로 주전자를 들고 술을 따르자 배시시 눈웃음을 흘렸다. 순간 정신이 아뜩해지는 것 같았다.

“야, 너 오늘 우리 젊은 아재 잘 모셔라. 아예 머리를 올리든가. 하하.”

정해수가 잔을 들어 올리며 선택을 보고 껄껄댔다. 무안한 생각에 다시 잔을 비우고 술자리가 깊어갈수록 선택은 저도 모르게 정신없이 취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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