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소(牛)①/ 나도 소고삐를 잡았다

  • 입력 2015.04.24 16:15
  • 수정 2015.04.24 16:16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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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날 저무는 논길로 휘파람 불면서
  아이들도 지금쯤 소 몰고 오겠네

4학년 가을 소풍 때 나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보물을 찾지는 못 했으나 <고향땅>이라는 이 노래를 불러서 공책 한 권을 상으로 탔던 기억이 생생하다. 농촌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이 아스라한 소싯적의 추억을 건져 올리기에 이만한 노래도 없다. 직접 소를 몰아본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떠올리는 ‘소 몰고 오는 아이들’이라는 그림의 배경은 석양빛 깔린 논둑길이 아니라 고향집 사립 앞의 고샅길이다. 저녁 무렵이면 일삼아 사립에 나가 앉아서, 소 먹이러 갔던 아이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물끄러미 구경하였다. 산에서 마을로 돌아오는 소들은 원 없이 먹은 탓에 한 결 같이 양 옆으로 빵빵하게 불거진 배를 하고서 뒤뚱 걸음을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오른 손에 고삐를, 왼손에는 꽃이나 열매가 달린 동백나무 가지나 산딸기 송이 따위를 쥐고서 유유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내가 부러워한 것은 꽃도 아니고 동백이나 산딸기도 아니었다. 소를 모는 아이가 고삐를 오른 쪽으로 잡아채면서 ‘이랴!’하면 그 덩치 큰 소가 순순히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고삐를 흔들어 오른쪽 배를 휘청휘청 두드리면서 ‘자랴!’ 하면 어김없이 왼편으로 도는 그 모습이 자못 신기하였다. 나의 우상이었던 사촌형은, 마치 조선 여인이 머리에 가체를 얹듯이, 고삐를 양쪽 뿔에다 모두 돌려 감아서 장식을 한 모습으로 귀가하였다. 자신은 뒷짐을 진 채 팔자걸음으로 뒤를 따르면서 순전히 입으로만 ‘이랴!’ ‘자랴!’ ‘워!’를 명령하였고 훈련이 잘 된 형네 집 암소는 귀신같이 그 말을 알아듣고서 좌회전, 우회전, 정지 등의 동작을 척척 해내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입을 떠억 벌렸다.

어느 날 나는 더는 참지 못 하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부지, 나도 인자부터 소 뜯기러 댕게야 쓰겄소.”

아버지는 나에게 처음으로 지게를 만들어줄 때처럼 두 말 없이 소 한 마리를 들여왔다. 돈이 어디 있어서 비싼 소를 금방 사왔느냐고? 모르시는 말씀. ‘배냇소’로 가져온 것이다. 남의 집에서 젖을 막 뗀 송아지 한 마리를 받아다가 잘 키운 다음, 그 소가 자라서 송아지를 낳으면, 어미 소는 돌려주고 새로 낳은 송아지를 차지하는 식이었는데 소작사육이라고 할까, 어쨌든 그런 방식의 사육, 혹은 그러한 소를 일컬어 배냇소, 혹은 새끼뗌이라 하였다.

요즘처럼 소를 우리에 가둬놓고 사육하는 게 아니라 산으로 들로 몰고 다니면서 풀을 뜯겨 키웠기 때문에, 소를 몰고 다닐 고만고만한 사내아이가 집에 있어야 소를 키워볼 엄두를 냈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소 고놈 하나 키우자고 품버리고 돌아다닐 수는 없었으니까.

“옛다. 잘 키워서 너 장개 밑천 한 번 벌어봐라.”

아버지가 송아지의 고삐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신이 났다. 요즘으로 치면 면허 따고서 처음으로 새로 산 차의 운전대를 잡은 기분이랄까? “이랴!” “자랴!” 나는 괜히 목청을 다듬어 그런 소리를 한 번씩 미리 질러보고 나서, 잘 갱긴 송아지 고놈을 앞세우고 사립을 나섰다. 들길을 지나 뒷산 들머리 도린곁 어디쯤에서 풀을 뜯길 요량이었다.

그런데, 나만 초보운전이 아니라 송아지 그 녀석도 야산에 풀을 뜯으러 가는 길이 초행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더구나 아직 코를 뚫지 않아서 코뚜레 없이 고삐를 목에다 감았으니 아무리 잡아당겨도 고놈이 앞으로 내닫는 힘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녀석이 신이 나서 내달렸다. 나는 끌려가면서도 고삐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고무신짝이 벗겨져 나가고, 고무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바지도 흘러내렸다. 언젠가 사촌형이 가르쳐준 ‘비상정지’의 비법을 활용하기로 했다. 고삐의 끝을 단단히 쥔 채로 끌려가다가 길가에 서있던 느릅나무의 몸통을 한 바퀴 돌아버렸다. 송아지가 멈추었다. 고삐를 나무에 묶고 나서 서둘러 바지를 추스르고 고무신을 챙겨 신었다. 히히히, 다행히 아무도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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