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16회

  • 입력 2015.04.19 13:34
  • 수정 2015.04.19 13:39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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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남자는 시내에서 꽤나 유명한 이였다. 선택은 그를 처음 보았지만 그가 하는 가게는 근동의 주민들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읍내에서 제일 큰 잡화점인 그의 가게에는 고무신부터 항아리 등속까지 없는 게 없는 만물상이었다. 그것 말고도 미곡상과 양조장까지 가지고 있는, 말하자면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알부자였던 것이다.

“오늘은 우리 허리띠 풀어놓고 맘껏 드십시다. 자자, 너희들 뭐하냐, 어서 술잔들 채우지 않고.”

▲ 일러스트 박홍규

다섯 명의 남자들 사이사이에 끼어 앉은 한복 차림의 여자들에게서 분 냄새가 왈칵 풍겨왔다. 파고들듯이 옆구리에 바싹 붙어 앉은 여자가 선택의 잔에 술을 따랐다. 한복 속의 말캉한 살이 마치 맨살에라도 닿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자리도 처음이려니와 여자를 아직 모르던 선택으로서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여기, 젊은 주사님은 내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통성명이라도 하고 만리장성을 쌓아야지, 난 정해수라고 하오.”

고급 양복에 머리는 포마드를 발라 넘겼고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는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선택은 아차, 싶었다. 본래 선택의 마을뿐 아니라 읍내에서도 숫자가 많은 정씨 문중이었고 해자 돌림이라면 선택보다 한 항렬이 아래였다. 선택이 아들을 낳으면 돌림자로 쓸 자가 바로 해였다. 따져보나마나 촌수로 치면 조카뻘일 게 분명했다.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면서도 그가 내민 손을 얼른 맞잡지 않을 수 없었다.

“예. 안녕하십니까? 정선택이라고 합니다.”

선택이 이름을 대자 그가 잠시 멈칫하는 기색이었다. 그 역시 일가붙이임을 확인하려는 것일 것이었다.

“우리 선택 씨는 우리 면 조합의 에에,, 그러니까 개척원입니다. 개척원이라도 보통 개척원이 아니고 중앙에서도 알아주는 그런 개척원이다, 이렇게 말씀드려야지요. 본래 서울에서 대학교까지 나오고 뜻한 바 있어서 고향 발전을 위해 돌아온 사람입니다.”

함께 온 부조합장이 그에게 선택을 소개했다. 대학을 나왔다는 건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그가 진짜 모르고 한 소린지, 정해수에게 일부러 과장되게 소개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선택은 고개만 약간 숙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만 있자, 그런데 택자 돌림이오?”

묻는 순서로 치면 봉화 정씨냐고 묻는 게 먼저일 텐데 그것은 당연하다는 듯이 돌림자를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일가붙이였다.

“예. 부사공파 이십팔 대 손입니다.”

“아하, 그럼 나한테는 아저씨 뻘인데, 이거 반갑습니다. 내가 아재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대개 촌수가 먼 일가붙이들끼리 한 항렬이 높으면 모두 아재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게 일반적인 호칭이었다. 그렇긴 해도 자신보다 이십 여 살이나 더 되어 보이는 이에게 그런 호칭을 듣는 게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로 말하면 읍내에서 손꼽히는 유지에다 오늘 술자리의 주연이었다.

“말씀을 편히 하시지요. 항렬이야 어찌 되었든 제가 훨씬 후배인데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그렇게 해도 되나? 하여튼 반가우이. 야야, 뭐하냐? 우리 젊은 아재한테 술 좀 듬뿍듬뿍 따르지 않고.”

정해수가 선택 옆에 앉은 여자에게 손짓을 하자 눈부시도록 노란 치마를 입은 여자가 얼른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부조합장의 소개를 들어서일까, 선택을 보며 배시시 웃는 여자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 어렸다. 스무 살 남짓이나 되었을까, 동그스름한 얼굴에 약간 살집이 있으면서 뽀얀 살결을 가진 여자였다.
“묘숙이라고 해요. 예쁘게 보아 주세요.”

바싹 귀에 대고 여자가 제 이름을 말했다. 귀속에 깃털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간지러워 선택은 흠칫 옆으로 물러앉았다. 그 모양을 보고 와아, 하고 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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