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15회

  • 입력 2015.04.12 13:33
  • 수정 2015.04.12 13:38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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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별 문제없이 한 면에 한 명씩 두게 한 농협 개척원으로 선발되었다. 월급은 정식 직원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이었다. 개인 돈을 써가면서라도 농민운동을 할 판인데 적으나마 월급을 받고 하는 것이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게다가 개척원은 선택이 마음 한 구석에 가지고 있던 불안감도 말끔히 씻어주었다. 이전에 했던 청년회도 그랬고 젊은이들이 모여서 무언가 하려고 하면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재열을 비롯한 청년회 간부들은 관에 끌려가서 경을 치지 않았던가. 조금만 이상한 기미가 있으면 사상이니 뭐니 하면 경찰서에서 조사를 나오곤 했다. 그 때마다 별 탈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국가에서 농협개척원이라는 보증을 해주고 월급까지 나오니까 그 누구도 시비를 걸 사람이 없을 터였다.

▲ 일러스트 박홍규

선택은 산동면 내의 13개 부락을 책임지는 개척원이었다. 그런데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선택은 꽤나 실망을 하게 되었다. 그 자신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농협운동을 일으키고 진정으로 농민을 잘 살게 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었는데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라는 걸 금세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개척원이 하는 일은 선택이 기대했던 것처럼 농민운동의 연장선상이 아니었다. 농협에서는 개척원을 마을에 심부름이나 하는 사람쯤으로 취급했다. 직원들이 하기 귀찮은 일, 그러니까 비료대금을 거두거나 잡부금을 걷는 일이 주요 일과였던 것이다.

“우선 각 동네에 리동조합 간판을 달라니께 그걸 먼저 해야되겄어.”

선택보다 두어 살 위인 농협 서기가 선택에게 처음 시킨 일이 그것이었다. 마을의 이장 집에 간이 간판을 달라는 것인데 ‘산동면 농업협동조합 시곡리 분회’, 이런 식의 문구만 주었을 뿐 일을 시킨 직원도 어찌 해야 할 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어쨌든 첫 번째 맡은 일이라 선택은 읍내의 목재소에 가서 같은 크기의 송판 열세 개를 구하고 붓글씨를 잘 쓰는 아랫말 일가붙이에게 부탁해 글씨를 받았다. 그래서 이틀 만에 간판을 만들어 마을마다 붙였더니 이게 금세 화제가 되었다. 사실 농협 직원들은 별 하는 일도 없이 날마다 술타령이나 하기 일쑤였다. 귀찮은 일을 이틀 만에 뚝딱 해치우는 걸 보고 아주 부려먹기 좋은 일꾼 하나를 얻은 것처럼 여기는 모양이었다. 엄연히 자신들이 출장을 나가야 할 일임에도 선택에게 시키는 게 다반사였다. 적은 월급에 자전거까지 장만한 선택은 발이 부르트도록 페달을 밟으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선택은 조금씩 농협이 가진 비리를 접하게 되었다. 직원들이 날마다 술타령을 할 수 있던 것은 농협이 가진 신용사업에 있었다. 농업은행과 통합이 되면서 농협은 초기부터 돈놀이를 하는 기구가 되었다. 실제로 농민들에게 해주는 융자금은 쥐꼬리 만큼이었고 큰돈은 농협직원과 친분이 있거나 지역에서 방귀깨나 뀌는 유지들에게 돌아갔다. 농협 융자금은 시중 금리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에 융자를 받는 것 자체가 커다란 이익이었고 눈먼 융자금을 받기 위해서는 농협 직원과의 유착이 필수적이었다. 이에 직원들도 융자를 해주면 으레 사례금을 받고 향응을 받는 걸 당연시했다. 어느 날이었다. 대개 퇴근 시간이 지나서야 농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 날은 일이 일찍 끝나서 직원들과 함께 나서게 되었다.

“어이, 우리 개척원이 수고가 많은데 오늘은 같이 가지?”

늘 일을 시키는 서기가 어깨를 치며 그렇게 말했을 때 선택은 저녁이나 한 끼 사주려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그들이 선택을 데리고 간 곳은 읍내의 요릿집이었다. 흔히 요정이라고 부르는 고급 요릿집이 읍내에 몇 군데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실제로 와보기는 처음이었다. 직원 넷과 선택이 들어서자 양복을 빼입은 중년의 남자가 반색을 하며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엉거주춤 손을 맞잡으면서도 선택의 눈은 다리가 부러지게 차린 음식상에 머물렀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산해진미가 가득한 상이었다. 갖가지 고기며 전이 구색을 맞추었고 나물 등속이며 고급스런 술병과 술잔이 즐비하게 놓인 상을 보며 선택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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