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지게·등짐②/ 지게 하나를 장만하다

  • 입력 2015.04.12 02:19
  • 수정 2015.04.12 02:2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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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 내 몫의 지게를 장만하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초등학생이 자가용 승용차를 갖는 ‘호사’를 누린 셈이다. 내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 중에서도 게으른 축이었음에도, 내가 지게를 갖고 싶다는 말을 꺼낸 지 보름도 안 되어서, 여남은 살 나이에 어울릴 크기의 꼬마 지게 하나를 뚝딱뚝딱 만들어 냈다. 어느 날 뒷밭에 밀 베러 가는 길에 길가 소나무 가지가 뻗은 모양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ㅓ’자 모양의 나무를 베어서 몸통 하나를 장만했다. 그런데 거기에 짝할 또 하나의 몸통 재료를 소나무 숲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지 엉뚱하게도 내(川) 건너 밭머리의 박달나무 가지를 징발하였다. 그 두 몸통 나무에 구멍을 뚫고 세장(가로목)으로 연결하였는데, 왼쪽과 오른쪽 몸통의 수종(樹種)이 다르니 그야말로 이종교배였다. 볏짚을 엮어 등태를 만들어 대고, 질빵을 땋아 붙이니 완성이었다.

“옛다, 니 지게.”

나는 신이 났다. 당장에 고놈을 지고 갈퀴나무 하는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뒷산에 가서 어머니가 갈퀴로 소나무 낙엽을 긁어모으는 동안 나는 이 나무 저 나무를 오르내리며 죽은 나뭇가지(서울말로 ‘삭정이’인 이것을 우리는 ‘자장개비’라 불렀다)를 꺾어 모아 새끼줄로 얼기설기 묶은 다음 지게에 올렸다. 역사적인 나의 등짐노역이 시작된 것이다.

생각보다 지게질은 쉽지 않았다. 그날따라 바람까지 불었다. 지게가 등에 달라붙지 않은데다 바람까지 불어 이리 뒤뚱 저리 뒤뚱 중심이 흔들렸다.

“어, 어, 어? 자빠질라!”

나는 어머니가 미처 내 자장개비 나뭇짐을 붙잡기 전에, 옆으로 게걸음을 하다가 그만 야트막한 풀밭언덕으로 구르고 말았다.

“쯧쯧쯧, 어린 것한테….”

아버지를 향한 원망이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이장인지 구장인지 하는 감투를 쓰고서 동네일을 본답시고 집안일은 나 몰라라, 하고 밖으로만 돌았다. 생각해보면 여남은 살짜리 아들에게 지게를 맞춰준 것도(그것도 아주 신속하고도 기민하게), 일찌감치 집안일을 나와 어머니에게 떠넘기기 위한 계략이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2년여쯤 뒤에는 아예 내 지게에 맞는 바지게까지 맞춰 주었다. 나는 2년쯤 뒤에야 일찍이 지게를 갖고 싶다고 아버지를 졸랐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였다. 그러나 처음 지게를 가졌을 때는 그저 신나기만 하였다.

처음엔 그저 ‘지게놀이’ 수준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지게 지는 자세도 제법 안정되었고, 운반하는 ‘화물’도 점점 무게가 늘어갔다. 다른 일들은 게으름 피우기 선수인 아버지는 내 신체 발육에 맞춰서 새 지게를 맞춰주는 일만은 제 때 해주었다. 나는 제법 상일꾼이 되어갔다. 나는 내가 짊어져 나르는 등짐의 무게를 실감해가면서 지게라는 그 물건이 잠시 잠깐이면 몰라도 평생을 가까이 할 만한 물건은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5학년의 어느 봄날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간 나는, 풋나무 두어 깍지(아름)를 칡넝쿨로 묶어서 지게에 지고 집으로 향했다. 오다가 길가에 핀 진달래 몇 송이를 꺾어 나뭇짐 위에 꽂았다. 그리고 그 무렵 사촌형한테서 배운 유행가 한 가락을 흥얼거렸다. 물론 낫과 작대기로 목발 장단을 맞추면서.

반짝이는 별빛 아래 소근 소근 소근대는 그 날 밤
천년을 두고 변치 말자고 댕기 풀어 맹서한 님아
사나이 목숨 걸고…


저만치에서 동네 누나들이 나물바구니를 들고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가까이 오자 더 큰 소리로 목발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누나들이 웃었다. 생각해보라. 배꼬마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목숨 걸고 바친 순정’이 어떻고 ‘무너진 사랑탑’이 어떻다는 등 쫑알거리고 있었으니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하지만 그 해, 나의 봄날은 포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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