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에 관한 기억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22

  • 입력 2008.02.17 13:48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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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이틀 전부터 몸이 어째 찌뿌둥하고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하는 것이 감기가 세배를 하러 오려나보다 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는 연방 콧물을 쥐어뜯으며 그날 할당치 복숭아나무 다섯 그루 전정을 마치고 목욕탕에 가서 좀 심하다싶을 만치 오래 생으로 땀을 흘렸다.

아내와 영천장에 가서 차례상 준비거리를 장만하는 동안에는 골치가 지끈거려도 참을 만 하더니 장을 다 보고 작업실로 들어서자 오한이 덮쳐 한나절을 난로를 끌어안다시피 하며 보냈다.

“소주 한 사발 따라 놓고 꼬칫가루 몇 숟갈 타서 콱 마셔뿌라.”

“니 같은 독종에게도 덤비는 감기는 독하겠다. 조심해라.”

작업실을 드나드는 사람마다 그렇게 한 마디씩 선무당 같은 소리를 한다.

“인자는 니도 늙었구나. 허허 참 니도 감기 하나.”

니 맛도 내 맛도 없는 점심 몇 술을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집으로 가 드러눕고 말았다.

잠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내렸다. 한없이 잤다. 어머니가 밥상을 들이밀면 꾸역꾸역 밥을 먹고 그대로 쓰러져 또 잠이 들었다.

잠자다가 느닷없이 설을 맞았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마루에 차례상을 펴고 술잔을 올려놓으니 어머님이 제기마다 담아놓은 제수를 내 오신다.

조율시이 조율시이 그런 순서로 4대위의 제수를 진설하니 좁은 마루에서 차례상은 올 설에도 기역자로 꺾어진다.

부침개는 세 가지로만 줄이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아내는 통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8대 주손(胄孫)으로 제사를 많이 모시지만 명절 때마다 우리 집은 번지 없는 두메산골 너와집처럼 조용하다.

아침 일찍 제관들이 파도처럼 몰려왔다가 차례 지내고 음복 한잔 하고 밥 한 그릇 뚝딱 비우고는 썰물처럼 빠져 나가버린다. 모든 대소가는 생가 마을에 있어 나도 아들놈과 거기 가서 명절을 보내는 형편이다.

설날 오후 나는 쓰러졌고 이틀이나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팔자에 없는 병원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으며 문득문득 20년 저쪽 서른 살 무렵에 받았던 눈부시게 하얀 사기대접 속의 새카만 약물을 떠올리곤 했다.

“세현이 아바이 저노무 손은 옛날부터 한번 아프면 저래 모질게 아펐다. 그런데 요새도 그게 들을라는강 모리겠다. 야야 니 그거 한번 묵어 볼래?”

생가 할마시가 서른 살의 기억을 펌프질 했다. 나는 심하게 이맛살을 찡그리며 아무 말도 하자 않았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은 그 약사발을 한번 더 받고 싶었다.

서른 살 시절 나는 서울에 살다가 오지게도 앓았다. 장맛비가 내리는 유월에 나는 오한으로 떨며 도저히 서울을 견뎌내지 못하고 죽을병에 걸린 환자 몰골로 할마시의 품안으로 뛰어들었었다.

아버지가 용하다는 한약방에 가서 두 번이나 약을 지어와 복용을 했지만 오한은 내 몸에 철옹성을 구축해 놓아서 도저히 섬멸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열흘을 훨씬 넘겨서 꾸역꾸역 한약만 들이켜고 있던 어느 오후였다.

“아주 귀한 약이다. 눈 딱 감고, 코 꽉 막고 한 숨에 마셔뿌라. 냄새 맡으면 안 된다.”

할마시는 한약 색깔보다 진하면서 얄궂은 냄새를 풍기는 하얀 사기대접을 내밀었다. 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잠깐 할마시의 눈빛을 읽었는데 나는 야멸찬 그 눈빛에 질리고 말았다. 어쩌랴, 이 차판에. 약사발을 받아들고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마셨더니 박하사탕 하나가 내 입으로 쏙 들어왔고 할마시 말씀은 너무 근엄했다.

“바싹 개물어라. 그라고 땀 한번 바짝 빼라.” 박하사탕의 단맛을 밀어내며 구역을 요구하는 그 약사발은 밤에 또 한번 내 손에 들어왔고 그 이튿날 아침 희한하게도 나는 제법 좋은 기분으로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그것이 개똥을 구워삶은 물이었다는 걸 나는 결혼한 뒤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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