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지게·등짐①/ 지게목발 장단에 봄꽃이 피고

  • 입력 2015.04.03 11:32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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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21세기의 첫 해였던 서기 2000년 말, 나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매우 희한한 공연을 감상할 기회를 가졌다. 베적삼에 잠방이 차림을 한 시골 노인 50여 명이 빈 지게를 진 채로 무대에 오르더니, 작대기와 낫자루로 지게목발을 두드려서 한바탕의 신명난 타악 연주판을 벌이던 것이다. 이날 무대에 등장한 ‘악기’는 전통시대 이래로 우리들의 가장 친숙한 운반도구 역할을 해온 지게였으며, 또한 그 지게를 악기 삼아 연주한 사람들은 음악이나 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시골 마을(충남 공주시 신풍면 선학리)에서 농사짓다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한 농민들이었다.

낫과 작대기를 양손에 나눠 쥐고 지게 목발을 번갈아 두드리기도 하고, 혹은 지게를 벗어서 목발을 바닥에 탕탕 부딪치기도 하는 등, 50명의 농민들이 한 몸인 듯 우리 가락의 세마치장단에 맞춰 선보인 그 집체동작에 서울 관객들은 열광하였다.

나는 공연 관람 후에 그 ‘지게소리’를 작품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던 주역들을 취재하러 선학리라는 시골마을에 찾아가서 지게에 얽힌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그런데 공연을 마친 뒤끝이라 그런지 마을 회관으로 축하전화가 연달아 걸려왔다. 옆에서 듣자 하니 이런 내용이 오고갔다.

- 이장 할아버지, 저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밴드부를 하고 있는데요, 지난번에 예술의전당에서 연주하셨던 그 악기 이름이 뭐예요?

“아, 그거? ‘지게’라고 하는 것인디… 기가 맥히게 좋은 악기여.”

- 언제 친구들하고 그 마을에 놀러 가면 그 악기 연주하는 법 좀 가르쳐 주실 수 있어요?

“갈쳐주기만 하겄어? 놀러만 와. 갖고 갈 수만 있다믄 악기 몇 개를 기냥 공짜로 줄 수도 있으니께, 허허허.”

이장은 전화를 끊고 나를 돌아보며 또 한 번 헛웃음을 쳤다.

“허헛, 차암, 지게가 악기가 돼부렀시유. 시상이 변해서….”

지금은 이때로부터 15년의 세월이 더 흘러버렸으니 지게가 우리의 일상에서 멀어진 거리가 훨씬 더 할 것이다. 물론 아직도 시골마을, 특히 차가 다닐 수 없는 길로 물건을 운반해야 하는 곳에서는 아직도 지게가 제 노릇을 찾아 한다. 나도 8년여 전에 지리산 산곡마을로 거처를 옮겼을 때 그럴 듯한 지게부터 하나 장만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농촌에서도 농민이 지게지고 시골길 걸어가는 풍경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예전의 전통 촌락에서는 산으로든 들로든 남정네가 집밖으로 나들이를 할 때면, 우선 싸리울에 기대놓았던 지게부터 들어 올려서 외투 삼아 등에 걸쳐 멘 다음에 사립을 나섰다. 그처럼 떼놓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지게가 이제 풍물 공연장으로, 혹은 민속박물관으로 물러날 채비를 하고 있다.

시골 사내들에게, 지게목발 장단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 여흥마저 없었다면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등짐 노동의 시름은 더 깊었을 것이다. 이 ‘지게소리’는 사내들이 삼삼오오 어울려서 산에 나무하러 갈 때 주로 연주(?)되었는데, 낫자루와 지겟작대기로 양쪽 목발을 두드리고 거기 맞춰서 노래를 흥얼거리면 되었기 때문에 다른 도구가 필요 없었다. 강원도 정선에서 만났던 한 할머니는, 처녀 적에 뒷산 언덕에서 나물을 캐고 있다가, 나무하러 가던 동네 총각이 지게목발 장단에 맞춰 부르던 정선아라리의 청승맞은 가락에 반해서 그만 그에게 시집을 가버렸다며 수줍게 웃었다.

나는 불과 여남은 살이던 어린 나이에 아버지에게 내 지게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어느 봄날 사촌형이 산에서 푸나무 짐을 지고 돌아오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나뭇짐 위에 꽂은 진달래 꽃송이가 흥겨운 목발장단에 나풀거리는 모습에 반해버렸던 것이다. 그거, 나도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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