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시할아버지의 4형제 께서 골짝에 터를 일구고 이웃으로 사셨던 곳입니다. 고함소리가 커서 육군대장이 별명이던 시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남편은 어려서부터 해야할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더 많이 보고 자랐을 것 같습니다. 타고난 기질에다 집안 분위기까지 겹쳐 장손답게 차분하다 못해 한없이 무겁기까지 합니다. 게다가 시할머니께서는 일찍 돌아가셔서 가부장적 집안 분위기가 최고조였을 법도 합니다. 물론 우리 집뿐만 아니라 동네의 분위기가 대부분 비슷하지요. 그런 집안에서 성장한 남편의 가정생활은? 잘 마른 빨래를 개어 본 적도 없고,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법 하나도 익힌 것 없이, 지글거리는 방바닥을 구태여 비질 해본 적은 더욱 없는 상남자였습니다. 이 남자와의 초기 결혼생활은? 독자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겨봅니다.
농촌에서 부부만 사는 것과 시어른과 함께 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까지는 아녀도 어쨌거나 류가 다릅니다. 부부사이에서 생기는 소소한 갈등은 나름의 방식대로 맺고 풀기를 반복하며 서로가 서로의 기대에 맞추어 변하고 성숙해집니다. 어떤 누구는 되고 어떤 누구는 변화가 안 된다고요? 사람은 상대방과 서로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관계에서는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매결혼도 가능하고 낯선 사람과의 공동체 생활도 가능한 것이겠지요. 문제는 둘이서는 좀 쉽게 풀 수 있더라도 시어른과 함께 생활할 때의 부부관계는 풀기가 더 어렵고 복잡하며 길게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편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어른들께서 절대중립의 위치에서 문제해결이 잘 되도록 양쪽을 지지해주면 더없이 좋으련만 대게는 한쪽으로 기울 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으로? 팔이 굽는 방향으로 말입니다.
가사노동 분담의 원칙에 대해서 한 두 번이 아니라 참으로 길게 오랫동안 반복해서 주장해온 덕에 이제는 바쁠 때면 남편이 먼저 개수대 앞에서 설거지를 하기도 합니다. 일터에서 먼저 돌아오면 밥을 해놓기도 하고 알아서 세탁기를 돌리기도 합니다. 오랜 장미와의 전쟁 끝에 다가온 변화인 것입니다. 다행히 요즘에는 시어머니께서도 시대에 맞게 살아야한다며 남편의 싱크대생활을 지켜보시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도 가끔씩은 허리 굽은 당신께서 설거지를 하시겠다고 소매를 걷어 올리십니다. 그럴 때마다 얄짤없이 남편이 할 것을 종용합니다.
농사일에서도 남녀구분이 점차 줄어들고 있고 어떤 일에서는 여성농민의 비중이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남성들의 경우 기계사용 시간이 많은데 비해 여성농민들은 몸을 많이 움직이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허리굽은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더 많은 것입니다. 게다가 농산물 값이 계속 폭락세에 머물고 있는 형편이다 보니 농사 양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상황입니다. 이런 조건에서 가사노동을 여성이 전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이런 조건에서도 맛있는 요리로 매 끼니를 채우고 또 말끔하게 정돈되어 쾌적한 공간에서 생활하고자 한다면 그야말로 여성농민은 신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간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지라 쉬기도 해야 하고 마음의 여유도 있어야 좀 사람답게 살 수 있지요. 언제나 가족의 기색을 살피며 생활하는 여성처럼 남성들도 가족, 특히 아내의 기색을 살피며 생활하노라면 지금보다 배로 행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관계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여성들의 특징을 따라하면 이 봄, 두 배의 행복이 보장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