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새끼③/ 작은 새끼로 큰 새끼를 꼬다

  • 입력 2015.03.28 11:05
  • 수정 2015.03.28 11:06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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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락 소설가
새끼줄은 그 쓰임새에 따라 굵기가 다르다. 짚신을 삼을 때 사용하는 새끼처럼 아주 가느다란 놈이 있는가 하면 어른이 잡으면 손아귀에 가득 차는 굵기의 ‘동아줄 급’ 새끼도 있다.

내 고향인 남해안 섬마을에서는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볏짚으로 꼰 새끼줄을 노 젓는 배(목선)의 밧줄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배를 접안하여 선착장의 말뚝에 묶어둘 때, 그리고 물속에 닻을 드리울 때 사용하는 그 밧줄은 특별히 튼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끊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섬마을 사람들의 전 재산인 배를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물론 소의 고삐로 사용하는 것 역시 일반 새끼줄과는 달라야 했다.

밧줄을 만들기 위해서는 꼰 새끼를 또 꼬아야 한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매우 흥미로운 장면을 구경하였다.

다 큰 어른 두 사람이 팽나무의 얕은 가지에다 각각 새끼줄 한 가닥씩을 묶어놓고, 20여 미터를 물러나서는, 연 날릴 때 쓰는 얼레 비슷한 데다 한쪽 끝을 묶고서는 한쪽 방향으로 마구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회전이 계속되자 멀쩡하던 새끼줄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어른들은 왜 멀쩡한 새끼줄을 훼훼 비틀어 돌려서 못쓰게 만들어 버리는 것인가?“

그러나 못 쓰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이 충분히 돌려 비튼 새끼줄을 각각 막대에 감더니, 그 막대 꾸러미를 교차하여 더 굵은 새끼줄로 결합해 내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는 세 가닥의 새끼줄을 비틀어서 더 굵은 밧줄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80년대 중반, 서울 소재 대학의 철학과인지 사학과인지에 재학 중인 남녀 학생들이 농활을 하는 현장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마지막 날에 주민들과 함께 줄다리기를 하고 싶어 하였다. 그 줄다리기에 쓸 굵은 줄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내게 의논해 왔다. 나는 일단 새끼줄을 구해다 주면서 각각 한 가닥씩을 맡아 충분히 비틀어 돌리도록 하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해야 되는지를 몰라 자꾸만 질문을 해왔다. 그래서 견고한 새끼줄이 꼬이는 원리를 다분히 ‘인문학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타오르는 정염(情炎)을 견디지 못하여 온몸을 비틀던 남녀가 서로를 와락 껴안고 한 가닥으로 합쳐지는 것!”

단단한 새끼줄을 꼬기 위한 준비 작업은 다분히 자기희생이다. 도도한 자기 모습을 포기하고 적당히 망가져야 더 큰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 개성 강한 성악가가 좋은 합창단원이 될 수 없는 원리와 같다.

1970년대 들어 키 작은 통일벼 파종이 권장(강요)되면서 농촌에서 새끼 꼬기 문화가 서서히 저물어 갔다. 그러나 옛적 우리 농민들의 생활 전반은 그 날줄과 씨줄이 모두 새끼줄로 연결돼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멍석, 덕석, 망태, 메꾸리 등의 생활 용품이 모두 새끼로 엮은 것들이었고 소의 고삐도, 전마선의 밧줄도, 빨랫줄도 모두 새끼줄이었다. 초가지붕의 박도 결국 새끼줄을 따라 넝쿨을 뻗었다. 새끼줄로 이어지고, 새끼줄로 결속되고, 새끼줄로 소통하였다. 심지어는 지붕갈이를 할 때 거두어서 변소 기둥에 걸어놓은 수명이 다한 새끼줄마저도 휴지가 궁하던 시절 밑씻개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삭은 새끼줄 한 토막을 잘라 조심스레 밑을 닦을 때, 항문 괄약근을 통해 전해지던 그 ‘옴찔!’하던 자극이야말로 나이든 우리들을 추억으로 이끄는 코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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