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3장 어떤 세월 9회

  • 입력 2015.03.01 23:39
  • 수정 2015.03.01 23:41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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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땅개가 헌병 명령에 고개만 까딱 혀? 일어나서 차렷한다. 실시!”

이런 등신 같은 놈, 하고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선택은 한 번 더 참았다. 이번엔 아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들은 척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호중이 비틀거리며 선택에게 다가오더니,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이었다. 고개가 앞으로 고꾸라질 만큼 센 손속이었다. 순간, 선택은 꼭지가 돌고 말았다. 벌떡 일어난 선택이 그대로 몸을 날려 호중의 얼굴을 머리로 받아버렸다. 억, 하는 비명과 함께 쓰러진 호중의 배 위에 올라타서 선택은 사정없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 일러스트 박홍규

“이 쌍놈의 새끼가 어디다 손을 대? 이 불쌍놈의 자식이.”

연신 뺨을 후려치는 선택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거푸 쏟아져 나왔다. 본래 상스런 욕을 입에 담지 않는 선택에게서 저도 모르게 나온 욕은 할아버지나 문중 어른들이 마을의 타성바지나 옛 머슴들에게 쓰던 욕이었다. 코피가 터져 이미 얼굴이 피범벅이 된 호중에게 주먹질을 하는 선택을 여럿이 달려들어 떼어놓았다.

“그만 혀라. 사람 하나 잘못 되겄다.”

“선택이 늬가 참아라. 저 자식이 본래 저런 놈은 아닌데 어쩌다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서 그런다.”

다들 호중이 하는 양을 눈꼴 시려 했음에도 그 위세에 눌려 그 동안 참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 와중에도 아직 정신을 잃은 호중이 걱정되어 물수건을 가져와 피를 닦고 팔을 주무르는 축도 있었다. 그들도 호중이 걱정되어서라기보다 그를 때린 선택이 혹 화를 입을까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선택은 여태 분이 풀리지 않아 식식거리는데 이내 호중이 눈을 뜨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 보았다. 아직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 때 언제 기별이 갔는지 벌컥 문이 열리더니 삼촌이 들어섰다.

“선택아, 뭔 일이여? 쌈이 붙었다니, 대체 언 놈이 우리 장조카헌테 싸움을 건 겨?”

당장 무슨 일이라도 낼 듯이 팔을 걷어 부친 삼촌은 선택이 멀쩡한 얼굴로 앉아있자 그제야 안도하는 빛이 되었다. 잠시 방안을 둘러보다가 드러누운 호중을 보자 삼촌은 다시 흥분했다.

“아니, 저 천가 새끼허고 싸움이 붙은 겨? 요런 싸가지 없넌 새끼럴 봤나? 오갈 데 없넌 타관붙이를 동네에 살게 해준 게 누군데, 감히 우리 집안 대주헌테 쌈을 걸어? 당장 일어나, 요놈의 자식아. 늬 아부진지, 개부랄인지 헌테 가자.”

싸움을 전말을 묻지도 않고 삼촌은 분기가 탱천하였다. 그제야 선택은 천호중의 아버지 이름이 천부달이라는 게 생각났다. 어른들은 그를 천부랄이니 개부랄이니 하는 천한 별명으로 부르곤 했다. 정신을 차린 호중이 완연하게 겁먹은 얼굴로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금방 부어올라 호기롭던 헌병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삼촌이 그런 호중의 어깨를 잡고 우악스럽게 일으켰다.

“나와, 이 쌍놈의 자식아. 내 오늘 아예 느 집구석에 싹 불을 싸지를 것이여.”

선택에게는 더없이 순한 삼촌이었지만 본래 욱하는 성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촌, 이제 됐어요. 제가 아귀를 지을 테니까 삼촌은 그만 참으세요.” 애들 싸움도 아닌 터에 삼촌이 끼어들어 제 편을 드는 게 좀 멋쩍기도 했다.

“아녀. 내 요놈의 종자들을 진작 요절을 낼라고 혔어. 지난 번 할아부지 상여 메구가다가 팽개친 눔덜 중에 이 자식 애비도 끼어있었다구.”

삼촌의 말에 선택도 설핏 다시 노여움이 끼쳐왔지만 그 자리에 있던 두엇도 낯빛이 일그러졌다. 정씨 집안과 타성바지 간의 오랜 반목 속에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젊은이들끼리는 애써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낡은 옛 관습이나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으로 치부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당장 선택만 해도 할아버지의 상여 사건을 들었을 때 얼마나 치를 떨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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