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어떤 세월 8회

  • 입력 2015.02.15 01:09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머니와 삼촌에게서 막상 결혼 이야기를 들으니 아직 생각이 없던 선택도 문득 결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같았다. 사실 그 쪽으로는 제대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숙맥이나 다름없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느라 한규네 집에 머물렀을 때, 친 오빠나 되는 것처럼 대해주던 한규 여동생 순옥이가 언뜻 여자로 보이기도 했지만 그걸로 그만이었다. 언제부턴가 연애 놀음 따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게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하지만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이제 때가 된 것이었다.

선택이 그런 눈치를 보이자 어머니와 삼촌은 이리저리 알아보는 눈치였다. 간혹 연애결혼도 있긴 했지만 거개가 중매로 짝을 맺었으므로 연줄로 처자를 찾거나 매파를 놓는 게 보통이었다. 선택은 되어가는 대로 보자는 생각이었다. 비록 제 혼사라도 당사자가 나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일러스트 박홍규
마을 청년들이 변화를 일으키게 된 또 다른 계기는 군대였다. 전쟁이 끝나고 국방력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면서 웬만한 청년들은 모두 군대를 다녀오게 된 것이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 몇 십 리 밖을 벗어나보지 못한 시골 젊은이들에게 군대라는 환경은 낯설고도 놀라운 것이었다. 그저 땅강아지처럼 흙이나 뒤집으며 평생 살 운명이라고 믿었던 이들이 팔도에서 모여든 젊은이들과 조직생활을 하고 규율과 잘 짜인 행정을 경험한 삼년은 학교 공부 이상의 사회 경험이 되었다. 면서기나 순경만 보아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숨을 곳을 찾던 예전의 청년들이 군대를 다녀오고 나면 서슴없이 관청 출입을 하고 순경 정도는 맞대놓고 이야기를 할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이 널리 떠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가르쳐도 세상 물정을 모를 것 같던 멍청한 자라도 군대를 마치고 오면 호기가 하늘을 찌르고 의욕이 넘쳐났던 것이다. 온갖 고생과 혹독한 훈련, 삼년 동안 습득한 지식과 정보 따위는 순박하기만 하던 시골 청년을 바꾸어놓기에 충분했다.

특히 시곡 마을에서는 선택보다 한 살 위의 마을 청년인 천호중이 군대에 대한 생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는 어쩌다 헌병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제대할 때가 지나고도 군대에 말뚝을 박겠다며 사년 째 복무 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일 년에 서너 차례나 휴가를 오곤 했는데 그 때마다 잘 다려 입은 군복에 총까지 메고 오는 것이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멀리 뒷산에 대고 총을 한 방 쾅, 하고 놓는데 이 산 저 산에서 메아리가 울려 온 동네가 그의 휴가를 알게 되는 것이었다. 실탄인지 공포탄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총을 메고 휴가를 나와서 마음대로 총을 쏘아도 누구 하나 그를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헌병대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군복이며 양말, 속옷에 군대에서 나오는 물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바람에 졸지에 제 땅 한 조각 없는 소작농인 천호중의 집은 살림이 피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덩달아 호중의 부모들까지 자식이 큰 출세나 한 줄로 알고 마을에서 말발을 세우게 될 정도였다. 호중이 휴가를 나올 때면 온 동네의 아이들까지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고 호중은 거짓말이 분명한 이야기를 뒤섞어 뻥을 치고는 했다.

워낙 설레발을 치는 통에 헌병대가 무섭다는 말만 들었을 뿐, 자세한 물정까지 모르는 면서기나 순경도 호중이 앞에서는 슬슬 피해 다닐 정도였다. 제 말 한 마디면 면장이고 경찰서장이고 모가지 떼는 건 일도 아니라는 헛소리에 마을에서는 그 누구도 반박은커녕 서로 잘 보이려고 하는 판이었다. 그런 호중이 휴가를 나왔다가 괜스레 선택에게 집적거린 게 작은 사단의 시작이었다.

“정 병장, 제대했다고는 들었구만. 어디 있었다고 했지? 관등성명 한 번 읊어 봐.”

몇몇 또래 청년들이 사랑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들른 호중은 시큰한 막걸리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보는 사이지만 수인사도 나누기 전에 하는 꼴에 선택은 기분이 상했다. 술 취한 사람이 농 비슷하게 하는 말이라고 여겨 가볍게 눈인사만 했다. 그런데 이 작자가 기어이 선택의 분을 돋우려는지 다음 말이 더 고약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