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농과 농생태학의 의미

  • 입력 2015.02.08 13:25
  • 수정 2015.02.08 13:31
  • 기자명 허남혁 (재)지역재단 먹거리정책·교육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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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남혁 (재)지역재단 먹거리정책·교육센터장

1월 한달간 남미를 여행했다. 사막, 고산, 빙하, 폭포, 열대우림 등 다양한 자연의 파노라마를 경험할 수 있었고, 자연환경에 따른 다양한 농업방식도 경험할 수 있었다. 한 가지 큰 수확은 남미의 농업모델 담론 역시 가족농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 서점에서 접한 농업정책 신간들 중 기업농이 아닌 가족농업을 주제로 하는 책을 여러 권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농장 하나가 천 헥타가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업농이 지배하는 아르헨티나였다. 단지 2014년이 유엔이 정한 세계 가족농의 해였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족농의 핵심은 소농이 실천하는 농생태학을 통해 도시민들이 원하는 로컬푸드와 다기능적 농업을 실현하는 것이다. 지난해 9월 29일 FAO 사무총장은 좀 더 지속가능하고 건강한 먹거리체계를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농업과 가족농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함을 촉구했다. 특히 물과 화학물질 사용량의 저감이 절실하며, 가족농의 중요성이 모든 의제 속에서 감안되어야 하고, 농생태학이 더 많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생각은 유엔 식량권 특별보고관들(<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의 저자 장 지글러가 가장 유명하다)의 강력한 주장이기도 했다. 최근 올리비에 드 슈터의 뒤를 이은 힐랄 엘베르는 지난해 9월 각국 정부가 농산업적 단작이 아닌 농생태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소농들로 보조금과 연구자금을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로지 소농과 농생태학만이 전세계를 먹여살릴 수 있다”는 강한 확신에서 나온 말이다.

최근 FAO의 주최로 열린 ‘식량·영양보장을 위한 국제농생태학 심포지엄’에서는 70명에 달하는 전세계 과학자들이 FAO에 보내는 서한이 발표되었는데, “농생태학에 대한 유엔 수준의 노력을 기후변화 대응과 물위기에 대한 회복력 제고를 위한 핵심적 전략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제2의 녹색혁명이 아니라 농생태학 모델로 전환하는 것이 전세계적인 농업의 향후 방향이자 발전모델이라는 인식이 국제기구들의 지지 하에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과 맞닿아있다. 다국적기업에게서 사야하는 투입재에 의존하지 않고 농업생태계를 과학적이고도 민주적으로 관리하면서 자연환경과 농민 모두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전지구적 식량위기, 기후위기 속에서 지역과 농업의 사회·경제·생태적 회복력(resilience)을 끌어올리는 데에는 산업적 농업이 아니라 농생태학 모델이 적합하다는 인식이다.

농생태학 개념은 1970년대 중미 국가들에서 시작된 생태농업적 전통농법들의 재발견과 정책적 지원, 그리고 수평적 농민네트워크를 통한 농업기술 전파 사례(농민에게서 농민에게로 운동: CAC)를 모태로 전세계적인 개념으로 등장하였고, 쿠바의 유기농 혁명을 통해 본격적으로 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 개념의 중요성은 전세계 전문가 500명이 5년에 걸쳐 지난 녹색혁명 시대의 농업과학기술이 빈곤과 기아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평가 끝에 2008년 발표된 ‘발전을 위한 국제농업과학기술평가(IAASTD 보고서)’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비아캄페시나를 중심으로 하는 전세계 농민운동 진영과 진보적 연구자 집단에서는 농생태학을 단순히 생태학적 과학으로만 보지 않고 진보적 사상 또는 사회운동으로 바라본다. “농생태학은 단순히 과학만이 아니다. 이는 농민 스스로가 무엇을 어떻게 기를지 결정할 공동체의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운동이다.” 에콜로지라는 단어는 생태론 또는 생태주의라는 뜻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프랑스 사회당 정권은 2012년 말부터 농생태학을 전면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농가의 생태적 농업과 사회경제적 자주성 강화를 통해 농업의 사회적·환경적 지속가능성을 증진하겠다는 취지에서, ‘지속가능한 발전’과 ‘지속가능한 농업’이라는 정책의 핵심 개념을 ‘농생태학’으로 변경했다.

비아캄페시나에서 1990년대부터 정립해온 농생태학, 로컬푸드, 식량주권 개념은 전세계의 가족소농들이 지역의 생태계를 주체적으로 잘 관리하면서 지역의 소비자들과 결합하여 전세계의 먹거리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세계로 확산시키고 있다.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안적 농업모델과 그 핵심개념은 명확하다. 우리가 협소한 친환경농업 논쟁에 매몰되어선 안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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