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어떤 세월 5회

  • 입력 2015.01.25 11:13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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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는 공식적으로 이장이 있고, 아랫말과 윗말에 따로 반장이 있었다. 이장은 관에서 인정하는 직함이었고 일에 대한 대가는 마을의 각 호에서 일 년에 보리쌀 닷 되씩을 걷어서 주었다. 전부 합치면 보리쌀 다섯 가마니까 살림에 상당한 보탬이 되는 수준이었지만 그나마 형편이 어려워 내지 못하는 사람이 꽤 있어서 세 가마 정도 수준이었다. 반장이라는 직함은 역시 관에서 부리기 좋게 붙여준 이름이었고 마을에서는 예전부터 부르던 이름인 소임으로 통했다. 대개 이장과 가까운 젊은 축에서 맡아 심부름이나 자질구레한 동네일에 앞장서는 게 그들의 하는 일이었다. 소임에게도 따로 보리쌀 한 되가 책정되었으나, 웬만해선 맡으려 하지 않았다. 소임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것이 마을의 심부름꾼, 심하게 말하면 예전의 공노비 비슷한 어감이어서 어딘가 덜 떨어진 사람이나 하는 일이려니 하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었고 사실 선택도 은연중에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겨울을 나면서 가만히 보니 마을에 전과 다른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반장을 맡고 있는 사람은 선택과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와 한 해 선배였다. 둘 다 마을에서 가깝다면 꽤나 가까운 사이였다. 그리고 그들은 전에 가졌던 선입견과 다르게 마을에서 무언가 주체적으로 일을 해보려는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전국 어느 농촌이나 비슷하였는데 시곡 마을에도 일종의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던 것이다.

▲ 일러스트 박홍규

“선택이 늬는 군대 있었으니까 몰랐겠지만, 작년하고 재작년에 우리 면에서 대단한 일이 있었다. 아주 난리였다니까. 그 뒤로 우리가 좀 발언권이 세졌지.”

1구 반장이자 초등학교 동기인 기종이 들려준 이야기는 꽤나 놀라웠다. 선택이 군대에 입대할 무렵에 면을 휩쓸기 시작한 도박에 대한 이야기였다. 선택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는데 채패라고 하는 도박이었다. 나중에 찾아보고 선택은 그것이 채표라는 중국식 도박의 일종임을 줄 알게 되었다. 도박 방식도 특이했다. 서른여섯 개의 각기 다른 글씨가 적힌 패 중에서 하나를 고른 후 거기에 돈을 거는 방식인데, 물주 겸 도박주선자는 사람들이 패를 고르기 전에 미리 자신의 패를 골라 보자기에 겹겹이 싼다. 보통 아침 일찍 자신이 고른 패를 싸서 미리 정해 둔 산 속 어디쯤에 가져다 둔다. 그 다음에 도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패를 고른 후, 건 액수를 거간꾼에게 건넨다. 밤이 되면 사람들은 산으로 가서 아침에 물주가 싸놓은 패를 까고, 그 패가 자신이 고른 패와 맞아떨어지면 서른 배로 배당을 받는 식이었다. 백 환을 걸어서 맞으면 삼천 환으로 불어나는 엄청난 도박이었다. 야심한 밤에 이루어지는 까닭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채표라고 하는 이 도박은 중독성이 강해서 면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마을마다 하지 않는 마을이 없었다고 했다. 서른여섯 개의 패라는 것이 꿈 해몽과 관련된 한자성어로 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간밤에 꾼 꿈을 풀어서 그에 맞는 패에 돈을 걸고 하루 종일 안절부절 했다. 하루에도 몇 명씩 서른 배로 돈을 불렸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눈이 뒤집혀서 채표에 매달리게 되었고 겨울에 주로 하던 심심풀이 잔돈푼 노름이 아닌, 재산을 탕진하는 본격적인 도박판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채표가 본격적으로 마을에 퍼지면서 마을 분위기가 순식간에 흉흉해졌다. 겨울에 새끼를 꼬거나 멍석을 짜던 사람들이 전부 도박에 미쳐 돌아갔다는 거였다.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아냐. 이 채패라는 게 희한해서 거기에 빠진 집에서는 아침에 일어나면 온 식구가 모여서 간밤에 무슨 꿈을 꾸었는지 서로 확인을 하는 거라. 만약에 애가 꿈에서 불을 봤다고 하면 그 꿈을 일단 아버지가 사. 글고는 불에 해당하는 패를 고르는 거지. 어느 집에서는 며느리가 좋은 꿈을 꿨는데 그걸 시아버지한테 안 팔고 제가 직접 패를 골라서 맞았다느니, 누가 거짓으로 꾸며서 꿈을 팔아먹었다느니 하여간 별별 웃지 못 할 일이 다 생겼어. 논문서 잡히고 돈 빌었다가 날린 사람도 부지기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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