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고혈 같은 대추차

  • 입력 2015.01.25 11:11
  • 수정 2015.01.25 11:12
  • 기자명 고은정 약선식생활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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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 못하고 계속 일을 하는 탓이겠지만 벌써 두 달여를 감기와 씨름하고 있다. 전 같지 않다는 소리를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나이인가보다. 다른 증세는 다 괜찮은데 계속 목이 불편하면서 기침이 쉬 그치질 않는다.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더니 새삼스레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재채기도 아닌 것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기침이 숨겨지지 않는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걱정도 걱정이지만 병원엘 가라, 뭘 좀 챙겨 먹어라 등등 어머니의 성화가 여간 성가시지 않다. 지난 추석 이후 대상포진으로 고생을 하시다가 그 끝에 독감까지 심하게 앓으신 어머니의 기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신지라 어머니 앞에서 자꾸 기침을 하는 내가 마치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 몸보다 마음이 힘들다.

▲ 대추차
아침에 일어나니 주방에서 달콤한 냄새가 난다 싶었는데 부쩍 등이 굽어보이는 어머니가 얼른 마시라며 컵을 들고 나오신다. 뭐냐고 여쭈니 기침 좀 나으라고 이것저것 넣고 끓였다 하신다. 솥 안을 들여다보니 무, 파뿌리, 도라지들과 함께 붉은 대추가 한 가득 들어있다. 장 볼 때 대추도 한 봉지 사오라고 하시더니 차를 끓이려는 생각이셨음을 이제야 깨닫고 컵에 담아 주신 차를 마시는데 눈물이 나려고 한다.

장을 봐온 대추가 크지도 않고 자잘하면서 암팡지게 생겼다. 대추를 잘못사면 크기는 크지만 건조가 덜 되어 나중에 곰팡이가 나고 썩기도 하는데 반짝반짝, 쪼글쪼글 잘도 말랐다. 조금 더 나이 들었을 때 내 얼굴이 이 대추 같았으면 좋겠다. 궁금해서 라벨을 보니 한살림에서 자주인증한 과일로 경북 의성에서 생산한 대추다. 한살림자주인증이란 한살림이 정한 생산출하 기준에 따라 제초제와 생장조절제는 일체 사용하지 않고 유기합성농약과 비료는 정해진 횟수와 기준량 이하로 사용된 것이라는 내용을 고지하고 있다. 그런 대추가 어머니의 마음과 만나 그런지 차의 맛도 제법 괜찮다.

장을 담그는 교육을 하는 나는 늘 대추를 챙겨가지고 다닌다. 약이 되는 음식을 교육하는 때에도 보혈(補血), 안심(安心)작용을 하는 대추를 빼놓을 수 없는 약재이므로 늘 골라 쓴다. 내 개인적인 사용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관혼상제의 상차림에는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대추가 올라온다. 각종 병과(餠菓)에 쓰이는 것은 물론 혼인의 폐백 음식에도 중요하게 자리하고 밥과 탕에서도 빠지지 않는 것이 대추이다. 대추는 또한 주술적인 의미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아무려나 어머니가 끓여주신 대추차(파뿌리나 도라지가 주 약재라고 끓이셨을 텐데 달달하라고 넉넉하게 넣는 대추 덕분에 대추차로 보이는) 덕분인지 기침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 큰 솥으로 한 솥 끓여 놓고 자꾸 데워주시니 주실 때마다 차는 점점 진해진다. 일 때문이라는 핑계로 책상 앞에 앉아 주시는 대로 받아 마시자니 밤 깊은 이 시간에 이놈의 차는 어머니의 고혈 같아 영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나저나 이 대추 괜찮다. 이제부터 계속 될 장 담그기 교육 때 항아리에 넣는 대추로 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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