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눈 속에서 결실 맺는 ‘설향’

  • 입력 2015.01.23 14:32
  • 수정 2015.01.26 09:19
  • 기자명 박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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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지 박선민 기자가 지난 19일 충남 부여의 한 딸기하우스에서 수확한 딸기를 고랑에 맞게 특별제작된 수레에 담아 나르고 있다. 한승호 기자
   
▲ 박 기자가 딸기 적과작업에 관한 이윤태씨의 설명을 유심히 듣고 있다. 한승호 기자

딸기 주산지인 부여군 홍산면. 농로로 들어서니 양쪽으로 딸기 하우스들이 줄지어 펼쳐져 있다. 아침 일찍부터 딸기 수확을 하러 온 농민들로 하우스 앞마다 서 있는 차들. 하우스 재배와 ‘설향’으로 품종을 개량한 덕분에 겨울에도 수확이 가능해진 딸기는 지금이 한창 수확으로 바쁠 때다. 바쁜 수확철에 조금이라도 일손을 보태고자 딸기 농가를 찾았다. 올해 딸기 생산 농가의 표정은 어떤지도 궁금하고, 갓 수확한 딸기를 먹겠단 기대는 덤이다.

서부여농업협동조합의 딸기작목회 총무를 맡고 있는 이윤태(44)씨와 박운태(42)씨 부부의 하우스를 방문했다. 딸기 재배 하우스 13동, 육묘장 4동. 부부 2명으론 일손이 한참 부족하다.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몸을 녹인 후, 딸기 수확작업에 돌입하려던 그 순간. 이윤태씨가 내 운동화를 보고 딸기 수확작업의 준비가 안 됐다고, 운동화 다 버려도 괜찮냐며 웃으며 말한다. 딸기밭이 진흙밭인 줄 미처 몰랐던 탓이다. 빌려주신 털 달린 고무장화를 신고 딸기 밭을 들어가니 운동화로는 작업이 턱도 없겠단 생각이 든다. 털 장화는 딸기 밭에 없는 획기적인 아이템이었다.

▲ 딸기는 손때가 탈수록 상품성이 떨어진다. 그만큼 포장에 들이는 수고로움이 수확에 못지 않다. 한승호 기자

잎 사이로 선홍빛 딸기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동식 수레에 바구니를 놓고 앞으로 밀어가며 익은 딸기를 골라 담는다. 딸기가 상할까 조심스레 따려고 노력한다. 두꺼운 옷을 입고 딸기를 따고 있으니 한 것도 없이 등에 땀이 난다. 딸기를 다 담은 바구니는 고랑 사이에 내려놓는다. 그런데 딸기가 유독 크다. 이씨는 모양이 예쁘지 않고 큰 것이 2화방 딸기라고 말한다. 2화방 딸기가 벌써 나오는 게 걱정이지만, 그래도 1화방 딸기를 가격이 좋을 때 출하해 다행이라고 한다.

딸기 바구니는 큰 수레를 끌고 와서 한꺼번에 수거한다. 한 수레에 10~15개 정도의 바구니를 담을 수 있다. 수레 이동도 만만치 않다. 이동하는 도중에 딸기를 건드릴까, 밭으로 수레바퀴가 굴러가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면서 수레를 끈다.

과수는 상품성 강화를 위해 ‘적과’ 작업을 한다. 모양과 크기가 적당한 상품성을 가진 딸기를 생산해내기 위해서다. 적과작업을 쉽게 하기 위해 딸기밭 고랑 사이를 움직일 수 있는 ‘이동식 의자’를 건네주신다. 털장화만큼 획기적이다! 이씨는 예전엔 그냥 쭈그려 앉아 작업해 허리에 많이 무리가 갔는데 이 의자 덕분에 작업이 훨씬 수월해졌다며 연신 기특했다.

그런데 적과작업은 하는 방법을 들어도 도통 어떻게 하는 줄 모르겠다. 행여나 잘 크고 있는 걸 떨어뜨릴까봐 걱정이다. 꽃만 봐도 어떻게 클지 안다는 이씨는 초보는 구별하기 쉽지 않다며 작은 꽃을 우선으로 따라고 하니, 작은 것만 열심히 딴다. 신중하게 버릴 것을 고르고 고르다보니 일의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1시간이 지나도 3분의 1밖에 못했다. 점심 먹으러 가자는 목소리에 한 줄은 하겠다고 쉽게 말한 내가 멋쩍어지는 순간이었다.

열심히 꽃을 따고 있는데 덥지 않냐고 누군가 말을 건넨다. 태국에서 온 딸기 하우스 ‘직원’들이었다. 딸기하우스에서 일을 시작한지 4개월. 이씨 부부는 이들이 일을 도와줘 한결 수월하다고 한다. 농한기에 접어든 농민들도 바쁜 딸기 농가에 품을 나눈다. 일손이 부족하기에 어느 도움이든 필요하고 반갑다. 그러나 외국인이든, 이웃이든 일손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농촌사회의 일손 부족을 해결할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수확 작업에 들어가기 전 딸기 농가가 겪는 어려움은 무엇인지 궁금해 물어봤다. “인건비, 농자재 가격 어느 것 하나 오르지 않은 것이 없다”는 이씨는 정부 지원 부족을 일순위에 꼽는다. “농사의 모든 과정을 내손으로 다하는 판에 정부 지원은 직접적으로 와 닿지도 않고, 귀농정책에 농업예산이 집중되니 정책으로 소외감도 느끼고요. 귀농정책만큼 기존의 농민도 지원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라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농업 활성화 정책이 오히려 기존의 농업을 소외시키는 아이러니다.

오후에는 오전에 딴 딸기를 포장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오전 일찍 공동선별장으로 출하한 이후 수확한 딸기는 농가가 직접 포장해서 공판장으로 보낸다. 부부가 나란히 앉아 노련한 솜씨로 딸기 포장을 한다. 포장을 도와드리겠단 말에 부부는 정중히 거절한다. 딸기의 예민한 성질 때문에 손으로 조금만 힘을 줘도 손자국이 나고 흠집이 생기기 쉽다. 이는 가격이 떨어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고 한다. 서툰 손길의 나로선 도와드릴 방법이 없다. 대신 포장 박스라도 열심히 접는다. 5~6시까지 포장을 끝내면, 이후엔 또 다음 날 포장할 박스를 준비해놔야 하기 때문이다.

수확도 포장도 농민이 일일이 해야 하니 일이 첩첩산중이다. 이씨는 소비자들이 예쁘게 포장된 것을 원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박씨도 바쁜 손길로 포장하면서 “포장이 가장 힘들어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손도 많이 가고 가뜩이나 요즘은 아이들 방학이라 돌보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포장이 버거워요.”라며 하소연한다.

“오늘 딸기 수확도 해보고, 적과도 해보고 딸기 농사 다 해봤네요.” 웃으면서 딸기를 한 박스 안겨주시는 이운태씨 앞에서 그야말로 농활이 아닌 수확체험 수준의 일손을 보탠 나로썬 겸연쩍고 송구스럽다. 수확 ‘체험’을 마치고 돌아보니 겨우내 열매를 맺는 딸기와 차가운 현실 속에서 농사짓는 농민의 모습은 닮아 보였다. 무거운 발길 뒤로 딸기 포장작업은 말없이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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