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어떤 세월 4회

  • 입력 2015.01.17 11:35
  • 수정 2015.01.17 11:36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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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사흘을 지내고 선택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아예 서울에서 자리를 잡을 생각까지 가지고 있던 터에 겨우 사흘 만에 낙향을 결심한 건 재열을 위시한 청년회원들의 모습에 실망한 텃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민주주의를 위한 시위가 아니라 한 달 후로 다가온 지방의회 선거에 직접 뛰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청년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정치권 이곳저곳에서도 손을 뻗치는 모양이었다. 도무지 돈을 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날마다 몰려다니며 밥과 술을 먹는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빤한 노릇이었다.

“선택 형, 어차피 지금은 비상한 시국입니다. 아는 사람만 알지만 지금 북한에서 통일을 하자고 제안까지 한 상태란 말입니다. 벌써 분단된 지 십오 년이나 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아예 통일까지 된다면 우리 민족사에 전환점이 되겠지요.”

얼핏 북한에서 통일 방안을 제시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긴 했지만 선택은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보다도 재열이 정치권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해서만은 해명을 들어야 했다.

“글쎄, 나는 다른 건 잘 모르겠고 우리가 하려고 했던 농촌운동에 대해서 결론을 들었으면 했소. 그리고 재열 형이 어느 쪽과 줄을 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치판에 끼어드는 거에 대해서 나는 반대요.”

재열은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형, 실은 나도 여러 가지로 고민을 했었지만, 어쨌든 지금 시기는 한가하게 농촌운동 운운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열화 같이 끓어오르는 이 정치적 열기를 올바로 지도해서 획기적인 성과를 거둘 때입니다. 형한테 털어놓자면, 형이 눈치 챘듯이 혁신계 쪽 정치인들과 함께 일을 하는 건 사실입니다. 물론 저는 지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는 민족통일연맹 쪽에 더 집중하는 입장입니다만.” 재열은 머리가 빨리 돌아가면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택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애써 잡으려 하지 않았다.

“선택 형이 농촌에 가진 열정을 잘 압니다. 저보다 훨씬 훌륭하게 농민운동을 하실 분입니다. 그리고 다시 사회가 바로 잡히고 안정되면 저 역시 농촌으로 돌아갈 겁니다. 먼저 가서 자리를 잡으세요.”

바쁜 와중에도 재열과 상호는 서울역까지 배웅을 나왔고 선택은 별 생각 없이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그것이 두 번 다시 재열을 만나지 못할 마지막 순간일 줄은 짐작도 못한 채.

▲ 일러스트 박홍규

어수선한 정국은 시골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읍, 면장에 시의원까지 뽑는 대대적인 지방선거가 펼쳐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의 농투성이들은 누가 사는 줄도 모르는 막걸리에 수염을 적시느라 선거판이 노다지판인 줄로 아는 지경이었다. 선택은 일단 겨울을 집에서 온전히 나면서 임상호가 보따리로 싸준 책을 읽을 작정을 했다. 삼년 동안 제대로 된 책 한 권 읽지 못한 선택으로서는 무엇보다 책에 목이 말라 있었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마을에서 자란 친구들이 놀러오기도 했다. 잘해야 초등학교를 마친 게 전부인 친구들은 거개가 집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시골 사람들이 많이 올라온다고 했지만 아직 고향 마을에서 이농을 한 경우는 드물었다. 친구들 중에는 이미 장가를 가서 애까지 낳은 축도 적지 않았다. 거기다 힘든 농사일에 치어서 아직 이십 대 초반에 제법 노숙한 티가 나기도 했다. 그들은 서울로 유학까지 갔다 온 선택에게 쉽게 곁을 주지 않았지만 선택이 적극적으로 그들과 가까워지려 했다. 어차피 그들이 농촌의 주축이므로 농촌운동에서도 주역을 맡아야 할 젊은이들이었다.

시곡 마을은 면내에서 중간쯤 크기의 부락이었다. 육십여 호가 1, 2구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보통 1구를 아랫말, 2구를 윗말이라고 불렀다. 윗말에 사는 이십여 호는 거의 다 정씨들이었고 아랫말에도 거의 절반이 정씨네 일가붙이였다. 그러니까 겨우 이십여 호 남짓만이 타성바지였다. 당연히 마을의 대소사는 정씨 문중에서 다 해나가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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