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어떤 세월 3회

  • 입력 2015.01.11 10:36
  • 수정 2015.01.11 10:37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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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재열처럼 정치적으로 들뜬 분위기가 온통 퍼져있었다. 선택이 서울에 친구들을 만나러 온 무렵에도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얼마 전에 열렸던 재판에서 4.19 때의 발포자와 부정선거 관련자들에 대한 선고가 너무 약하다는 데 대한 항의였다. 재판부는 1심에서 발포책임자인 서울시경국장에게만 사형을 선고하였을 뿐, 주요 대상자인 내무장관 홍진기나 경호실장이던 곽영주에게 고작 징역 9월과 3년을 선고했던 것이다. 시위대는 마침내 의사당으로 쳐들어가 국회를 점령하는 사태로 번졌다. 만여 명의 국회 점령에는 재열과 몇몇 청년회원들도 끼어 있었다.

“결국 우리가 국회로 쳐들어가지 않았다면 특별법이 제정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의 민주당 정권은 비록 선거에 의해 뽑혔다고는 하지만 혁명을 수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혁명을 해나갈 세력은 청년학생들이며 여기에서 우리의 투쟁을 멈춘다면 우리는 반민족, 반인민 세력에게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재열은 사자후를 뿜듯이 열변을 토했지만 선택은 그저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들은 다시 시내의 집회에 가기 위해 일어섰다.

“선택 형, 아직 혁명의 열기를 만끽하지 못하셨지요? 같이 나갔다가 오늘 밤에 실컷 이야기나 나눕시다.”

재열은 당연히 선택도 따라나서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선택은 선뜻 그들을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인사할 곳도 있고 해서 다음에 하세. 이제 시간이 많으니까.”

선택이 머뭇거리다 대답하자 재열은 하얀 잇속을 다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허긴 금방 상경했으니까, 볼 일이 많겠지요. 언제라도 여기로 오십시오. 여기가 우리 아지트라고 보면 됩니다.”

▲ 일러스트 박홍규

그들이 바람처럼 나가고 난 뒤, 선택은 잠시 인사만 나누고 제 방으로 물러났던 임상호를 찾았다. 어쩐지 재열보다 임상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선택 형. 재열이가 지금 혁명 사령부의 돌격대장 비슷하게 되었어요. 지금이야 쟤들 세상이지만 나는 좀 조마조마해요. 세상이 그렇게 쉽게 뒤집히는 게 아닌데.”

임상호는 평소와 다르게 조금 어두운 표정이었다.

“세상은 이미 뒤집힌 거 아니었소? 재열 동지 같은 사람이 주도권을 잡고 해나가면 나라가 좀 바로 설 거 아니오?”

선택의 말에 임상호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글쎄요, 저는 비관주의자라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 역사를 보아도 이렇게 간단하게 사회 혁명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요. 더구나 우리나라는 그런 역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4월 혁명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저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구요, 이게 재열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회 혁명으로는 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입니다.”

재열의 말에 따르면 임상호는 전형적인 먹물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임상호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어딘지 들뜬 재열보다 임상호가 더 제대로 현실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의 방 가득 꽂혀있는 책들의 부피가 그의 말에 믿음을 더해주는 것도 같았다.

“그럼, 임형은 지금의 사태가 어찌 될 것 같소?”

선택은 정말 궁금했다. 청년회가 해체되었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개인적으로도 막막했다.

“전들 알 수가 있나요? 어디까지 흘러가는지 두고 볼 수밖에요. 다만 이런 식의 혼란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겁니다. 대중이라는 속성이 오랜 혼란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어떤 식으로 반동의 물결이 몰아칠지가 두려울 뿐입니다.”

임상호의 말은 알듯 모를듯했다. 재열의 절친한 친구이면서도 재열과 반대편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 같기도 했다. 그러나 임상호가 가진 두려움을 선택도 어렴풋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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