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어떤 세월 2회

  • 입력 2014.12.27 14:00
  • 수정 2014.12.27 14:01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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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다음 날부터 마을의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보다도 몇 살이 위인 큰집 할아버지는 총기가 흐려져 선택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그럼 우리 애들하고 몇 촌간이냐?”

참봉댁 할아버지가 촌수를 물은 것도 정신이 온전치 않아서였다. 족보며 항렬을 꿰고 있던 예전 같으면 금세 몇 촌 지간임을 알았을 것이었다. 정작 촌수가 어찌되는지 헷갈린 것은 선택이었다. 아마 십육 촌쯤이나 될 듯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다 대내간입지요. 칠대 조에서 갈라져 나간 게 선택 아재네니까요.”

선택이 우물거리는 사이에 곁에 있던 큰집 장손이 거들었다. 항렬로 따지면 한 대 아래여서 아재라고 칭하긴 하지만 선택보다 서너 살이나 나이가 든 이였다. 게다가 일찍 서울로 가서 학교를 다닌 터라 선택과는 겨우 얼굴이나 알고 지낸 정도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가 선택을 꽤 살갑게 대하는 눈치였다.

“할아버지, 이 아재가 우리 면에서 제일로 공부 잘했던 학생이었어요. 우리 정씨 집안 인물입지요.”

자리를 물러나올 때에서야 선택은 그의 이름이 우재라는 것을 겨우 기억해냈다. 종가는 워낙 여러 형제여서 이름이 영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집안으로야 조카뻘이라고 하지만 나이도 많고 부잣집인 종가의 자손이라 어렵게 느껴졌는데 그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군대도 제대했으니까 아재는 다시 서울로 가겠지요?”

“아직 특별히 계획하고 있는 건 없습니다. 조카님은 서울 사시는 거지요?”

달리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호해서 그렇게 묻자 허여멀쑥한 그가 과장된 웃음을 지었다.

“이거 진작 아재를 알았으면 서울에서 좀 만나고 그랬을 텐데. 사실 아시다시피 아버지가 하고 있는 사업을 돕고 있는데 믿고 일할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일가 중에 아재 같은 사람이 도와주면 참 좋겠는데.”

선택은 그들이 무슨 사업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어머니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더 말을 섞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관심을 보였다가 일가붙이끼리 얽히면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선택에게는 재열을 비롯한 청년회가 우선 만나야 할 사람들이었다.

▲ 일러스트 박홍규

선택은 당장 서울을 다녀오고 싶었지만 바쁜 가을걷이를 외면할 수 없어서 달포쯤 머물다가 늦가을도 저물 무렵에야 겨우 서울로 갔다. 미리 편지를 보내놓았던 터라 명륜동의 임상호 집에는 재열을 위시해서 칠팔 명의 반가운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저마다 반갑게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눈 다음 꽤 걸게 차린 술상이 나왔다.

“선택 형, 고생 많았습니다. 이제 정말 큰 일을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지 전과 다른 분위기가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선택은 무엇보다 청년회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우리가 했던 농촌운동은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겁니까? 청년회 조직은 어떻게 되었구요?”

선택의 질문에 좌중에 잠시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설명을 한 것은 역시 재열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청년회는 발전적으로 해산되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사실 혁명 후에 의견이 좀 나뉘었습니다. 청년회를 재건하여서 다시 농촌운동에 매진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혁명의 열기를 이어서 민족운동, 그러니까 정치운동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저와 여기 모인 분들은 후자 쪽에 가까웠지요. 제가 감옥에 있으면서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정치, 그러니까 권력의 문제가 핵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농민을 비롯한 근로대중을 기반으로 한 권력을 수립해야만 모든 문제가 풀리게 됩니다. 단순하게 농촌, 농민운동으로는 백년하청입니다. 이번 기회에 정치모리배들을 쓸어버리고 근로대중 정권을 세워야만 농민문제나 민족문제가 풀리게 됩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재열이 정치적으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급진적으로 나갈 줄은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감옥의 경험과 혁명의 열기가 그를 변모시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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