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어떤 세월 1회

  • 입력 2014.12.21 12:05
  • 수정 2014.12.21 12:06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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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그 사이에 삼촌은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태어난 지 채 열흘이 되지 않은 핏덩이가 낯설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끌리는 게 있었다. 어머니와 삼촌 내외에게 큰 절을 하고 마주 앉자 어머니의 눈시울이 젖어왔다.

“삼년 동안 면회 한 번 못 가고,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몸보신이라도 해야 할 건데 집안 꼴이 이러니.”

“우선 닭이라도 한 마리 잡아야쥬. 우리 집안 대주가 제대를 했는데 무어가 아깝것시유?”

삼촌은 정말 금세 닭을 잡아와 마당에서 목을 비틀었다.

“에고, 힘들게 몸 푼 사람한테도 그저 맨 미역국을 끓여주었는데, 느이 작은 아부지가 늬 생각은 참으로 끔찍하게 헌다.”

가슴 한 편이 뭉클했다. 예나 지금이나 삼촌은 묵묵히 일만 하면서 두 조카를 위해 산 사람이었다. 자신은 일찍 죽은 형에게 치어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으면서도 그런 내색 한 번 하지 않은 어진 사람이었다. 어딘지 조금 두려운 듯한 눈빛을 하고 선택을 바라보는 여자, 혼례식도 올리지 않고 작은 어머니가 된 여자가 갓난애를 안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선택은 선뜻 입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인사를 건넸다.

▲ 일러스트 박홍규
“작은 어머니, 고생 많으셨지요? 참 애기 이름은 뭐라고 지었나요?”

“순옥이라고 지었어요. 정순옥.”

“우리 집안에 여아가 태어난 게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렇지요?”

어머니는 그렇지 않아도 야윈 몸피에 주름이 지고 가을 햇볕에 타서 마주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렇지. 너한테 고모가 없고 또 여형제도 없으니까, 삼대 만에 나온 여식이다.”

그 동안 밀린 이야기를 들으며 선택은 마을에서 꽤나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본래 육십 여 호 정도 되는 마을의 집 중에 절반 이상이 정씨들이었고 그 중심은 언제나 참봉댁이라는 택호로 불리는 큰집이었다. 그저 큰집이라고 부를 뿐 선택과 따지면 십촌을 훨씬 넘어가는 먼 일가라 할 수 있었다. 마을의 대소사가 다 정씨들이 주도해서 이루어지고 타성바지들은 제대로 말발을 세우는 사람이 드물었다. 게다가 마을의 전답이 거의 다 정씨 집안 소유였다. 물론 큰집이 절대적이었다. 정씨의 땅이 십이라면 그 중 칠 이상이 큰 집 소유였다. 참봉댁에는 멀리 전라도 어디에서도 도조를 보내온다고 했고 전답뿐 아니라 마을을 둘러싼 크고 작은 산들의 문서도 죄다 그 집에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같은 정씨라도 참봉댁은 비교가 불가한 부자였고 나머지는 처지가 각양각색이었다. 머슴을 두고 떵떵거리는 작은 부자들도 있고 제 땅 부쳐 먹고살만한 집이 있는가 하면 큰집 전답을 얻어 소작을 부치는 이들도 있었다.

참봉댁의 엄청난 전답이 절반 넘게 부서진 것은 전쟁 전의 농지개혁 때였다. 미리 돌려놓기도 하고 팔아서 돈으로 바꾸어놓기도 했지만 적어도 수만 평에 달하는 전답이 농지개혁으로 날아갔다고 했다. 당시 선택네 집도 분배 대상자였다. 자가 소유의 전답이 얼마간 있었지만 평균에 미치지 못해서 원하기만 하면 약간의 땅을 분배받을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완강히 반대해서 아예 신청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일가붙이면서 시향을 모시는 참봉댁의 땅을 손에 넣는 짓 따위를 결코 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참봉댁에서 어차피 분배될 땅이니 신청을 하라고 했지만 역시 할아버지는 왼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농지개혁이 있었지만 여전히 참봉댁은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몇 만 평씩 되는 산의 문서만 상자로 가득이라고 했다.

“큰 집 장손이 서울 살잖냐? 근데 뭔 큰 일을 한다고 하드니 일이 잘 안 되는 가보더라. 소문에는 벌써 땅 문서를 반 넘게 가져갔다고도 하고, 서울에 있는 그 큰 집이 넘어갔다고도 하고.”

마을을 잘 나다니지 않는 어머니이니 필시 삼촌이 들어온 소문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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