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애동지에는 팥밥 해먹기

  • 입력 2014.12.21 12:03
  • 수정 2014.12.21 12:04
  • 기자명 고은정 약선식생활연구센터 소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가 지리산으로 내려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지리산엔 큰 변화가 생겼다. 지리산생명연대의 부설기관으로 (사)숲길이 만들어지고 지리산을 넓게 에둘러 걸을 수 있는 길을 복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리산 둘레를 잇는 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 잇고 보듬는 길을 찾아내는 길고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2008년 4월엔 지금은 3코스로 알려진 구간 중의 일부를 걸어서 창원마을의 당산나무 아래에 모여 발대식을 가졌었다. 그곳으로 걸어 오르는 길에서 만난 산채나 야생화, 오래된 나무의 새순들이 이른 봄의 햇살과 만들어낸 풍경을 모두 잊지 않고 있다. 당산나무의 잎들이 바람과 만나 내는 소리와 허리 굽은 할머니가 두 손을 모으고 드리는 기원의 소리가 만들어내던 노래는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하여 일상에 지친 나를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한 에너지로 지금도 남아있다.

▲ 팥밥
그 무렵 숲길은 지리산의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의 안내를 위해 길동무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그 길동무 양성 프로그램에서 나는 인생을 함께 걷는 친구를 하나 만났다. 서울에서 의료노조활동을 하다가 건강이 나빠져 귀농을 한 동갑내기를 만난 것이다. 이명박정권이 숲길의 지원을 중단하기 전까지는 가끔 산에서 만나기도 하였지만 그때를 끝으로 나는 바깥의 강의에 매달리게 되었고, 그녀는 농사에 전념하면서 마을 안에서 이런 저런 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며칠 전 서울에서 있었던 슬로푸드위크에 참여하기 위해 그녀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통화를 하는 중에 간간이 들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아 물으니 팥을 고르고 있는 중이란다. 소소하게 텃밭농사를 하는 친구니 쌀을 제외하고는 한 가지 작물을 집중적으로 재배하지 않아 팥도 얼마 되지 않는다며 일부 나눠주었다. 모든 농산물은 누군가 직접 농사지은 것이지만 그래도 얼굴을 아는 생산자를 통해 내 손으로 들어오는 농산물에 대한 애착은 좀 더 크게 느껴진다. 친구의 팥은 일 년간 우리 집의 대소사에 다양한 음식으로 상에 오를 것이다.

팥으로 음식을 해먹는 동지(冬至)다. 올해는 윤달이 끼어 있어 음력으로는 10월 말에 동지가 들었으니 팥죽이 아니라 팥밥이나 팥시루떡을 해먹는 애동지다. 가을무 듬뿍 썰어 넣고 팥무시루떡 쪄서 먹으면 맛도 좋고 소화도 잘 되고, 더불어 내년에 나에게 올 준비를 하고 있던 액운이 다 날아가 버릴 것이니 좋을 것이다. 시루떡 찌기가 어렵고 번거로울 땐 팥밥만으로도 훌륭한 동지음식이 된다. 과학의 눈으로 보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일지 모르나 뭐 어떤가. 매일 해먹는 밥이니 동지라 이름 붙은 날에 조금만 마음을 내서 팥밥 해먹고 귀신과 액운 쫓았다고 생각하면 더 즐거운 새해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저녁엔 팥을 삶아 팥물을 만들고 찰밥을 지어 지리산에서 만난 친구들을 부르고 한 해를 마감하는 조촐한 파티라도 해야겠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