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46회

  • 입력 2014.12.13 12:36
  • 수정 2014.12.13 12:37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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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생활 막바지에 선택은 졸병일 때 미처 몰랐던 여러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일반 사병들이야 본래 억지로 삼년을 때워야 하는 군대지만 장교들은 달랐다. 그들은 가정을 이루며 사는 직업 군인인데도 월급이 형편없었다. 그야말로 쥐꼬리라는 말이 어울릴 지경이었다. 어느 날 소대장의 호출을 받고 갔다가 선택은 황당한 부탁을 받았다. 장병들에게 나갈 주식과 부식, 각종 보급품이 들어온 날이었다. 그는 선택에게 쌀과 밀가루, 비누, 치약 따위를 따로따로 포장하게 했다. 한 소대가 한 달은 버틸 만 한 양이어서 부피가 엄청났다.

“이따 수송트럭 들어오면 이걸 싣고 현리까지 다녀온다. 거기서 다른 차에 실어주고 오면 끝이다.”

간단한 명령이었고 선택은 그게 무슨 뜻인지 곧바로 알아들었다. 사병들 사이에 은밀하게 소문으로 떠돌던 군수품 빼돌리기였다. 그런데 아예 공식적으로 운행하는 수송 트럭으로 빼돌릴 줄은 몰랐다. 전방에는 일본에서 들여온 닛산트럭이 물자를 나르는 차량으로 오가고 있었다.

“제가요?”

당황한 나머지 선택은 해서는 안 될 반문을 하고 말았다. 여하 간에 상관의 말에 토를 달거나 반문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금세 주먹이 날아들 것 같아 바싹 얼어있는데 소대장이 선택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럼, 여기 정병장 말고 누가 또 있나? 왜 놀란 얼굴을 하고 그래?”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선택에게 그가 담배 한 개비를 내밀었다. 얼마 전부터 입에 대기 시작해 한참 맛을 들인 화랑 담배였다. 아마 제대가 멀지 않은 병장이고 시키는 일이 또한 떳떳하지 않은 일이라서 호의를 베푸는 것일 터였다. 선택은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정 병장 얼마 남았지?”

“네 달 남았습니다.”

“좋겠구만. 나도 얼른 제대하고 고향으로 가서 농사나 짓고 싶은데.”

소대장은 선택과 동갑이었다. 사병으로 들어왔다가 차출되어 하사관 훈련을 받고 소대장이 된 자였는데 월급을 조금 더 받는 대신에 복무 기간이 육 개월쯤 길어졌다. 원한다면 군대에 말뚝을 박아도 된다고 했다.

▲ 일러스트 박홍규

“난 군대가 체질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못해 먹겠어. 사실 군인들 월급 가지고 못 살지. 이게 누구한테 가는 것 같나?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까지 뒤로 빼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니까. 위에서도 다 알면서 눈감아주는 거고. 다들 적당히 알아서 해먹으라는 거지.”

그 날 소대장은 비누와 치약, 수건 양말 따위로 따로 한 꾸러미를 만들어 선택에게 주었다. 집으로 부쳐주라는 것이었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시골에서 그 귀한 물품을 받고 좋아할 어머니와 삼촌을 떠올리자 도무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언제 어디서든 장남 노릇을 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식구들이 그것을 받으면 얼마나 기뻐할지 잘 알고 있었다. 선택도 그렇게 꼭 한 번 빼돌리기에 동참하게 된 것이었다.

어느 정도 소대장과 공범자 비슷한 위치가 되자 점점 자주 그런 일에 끼어들게 되었다. 군수품 빼돌리는 일뿐이 아니었다. 소대원 전체를 동원하여 며칠씩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 넘긴 일도 있었다. 적당한 길이로 토막 낸 나무들은 역시 닛산트럭에 실려 목재상으로 실려 갔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불법적인 일이었지만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동원된 사병들에게는 부족한 부대 운영비로 쓰인다고 했지만 실은 사단장 정도 급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게 틀림없었다. 종일 나무를 자른 병사들에게 돌아온 것은 독한 막소주 몇 병이 고작이었다.

그 해 구월 말에 마침내 선택은 군 생활을 마쳤다. 끔찍하게 춥고 배고픈 삼년이었다. 구불구불하고 먼지가 날리는 길을 몇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고향 읍내로 돌아온 것은 야심한 밤이었다. 버스가 이미 끊어졌고 밤길 삼십 리를 걸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 든 몇 장의 지폐를 만지작거리다가 선택은 버스 정류소 근처의 국밥집에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역전으로 갔다. 그곳에서 밤을 지새우고 새벽에 집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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