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흙바람 45회

  • 입력 2014.12.07 11:23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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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물러난 후 군대 내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제대를 앞두었던 군인들의 전역이 미루어지기도 했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전방부대 일원에는 비상경계령이 내려졌고 일체의 외출이 금지되었다. 데모가 격화될 때마다 북한의 침략 운운하던 연대장의 훈시도 뜸해지고 무언가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으나 말단 병사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고참 동기들끼리 앞으로의 정국을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으로 전망하는 속삭임이 오가는 정도였다.

“이박사가 물러나면 대통령은 누가 하는 것이여? 참말로 천지가 개벽을 했나보네.”

“시방 고것이 문제여? 즌쟁이 난다고들 안혀?”

사회에 대한 상식이라고는 거의 없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군대로 끌려온 이들이 대다수였다. 선택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을 가진 이는 두엇에 불과했다. 게다가 접할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어서 간간이 장교들한테 흘러나오는 이야기나 확인할 길 없는 소문 따위가 대화의 밑천이었다.

“지금 과도정부가 들어섰다니까 거기서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게 될 겁니다. 아마 내각제로 하자는 말이 많은 거 같던데.”

그나마 들은 이야기들을 통해 조금은 사정을 짐작하고 있던 선택의 말에 대개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과도정부는 뭐고 내각제는 또 뭐여? 우리는 당최 알아먹덜 못허겄네.”

그러고는 자리를 뜨는 사람이 더 많았다. 선택으로서도 딱히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과도 정부야 임시로 정부를 맡은 것이라 해도 내각제를 제대로 풀어낼만한 지식은 없었다.

선택에게 제일 중요했던 일은 그 해 유월에 기다리던 김재열의 편지가 온 것이었다. 이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사월혁명 덕분에 출소한 것이었다. 그래도 일 년 반이라는 옥살이를 치르고 난 뒤였다. 재열은 여전히 씩씩한 어조로 안부를 묻고 돌아가는 사정을 알려왔다. 선택은 아직도 꺼림칙한 기분이 들긴 했다. 만약에 다시 무슨 일이 일어나서 정부가 뒤집히는 날이면 그 동안 잘 숨겨왔던 재열과의 관계로 인해 사단이 날지도 몰라서였다. 하지만 우선은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재열은 편지에서 출소하자마자 다시 예전의 청년회원들을 규합하고 있으며 자유로워진 사회 속에서 보다 제대로 일을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선택 형. 공기마저도 맑고 자유로워진 듯합니다. 먹구름처럼 우리나라를 덮고 있던 독재권력이 물러난 자리는 자유와 젊은 기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제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하루 빨리 형이 제대하여 이 나라와 농촌을 위해 손잡고 일하고 싶습니다. 그 때까지 건강하게 군 생활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재열의 편지는 그렇게 끝맺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힘이 들어 있는 그의 어투처럼 편지도 그러했다. 재열의 편지를 받고서야 선택은 우리나라 사회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대통령이라면 이승만 외에 그 누구도 상상해본 적 없기는 선택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차피 투표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기에 늙은 그가 자연사하는 방법밖에는 다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고등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시위에 몰려 스스로 물러나다니, 그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재열의 편지 속에는 서울의 들끓는 듯한 분위기가 숨 쉬고 있었다. 날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새로운 사회에 대한 난상토론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선택도 들어서 알고 있는 정치인들의 대중 강연에는 수백 수천 명의 청중들이 몰려들고 청년 단체들도 속속 결성되는 모양이었다.
 
다만 선택은 재열의 편지 속에서 전에 느껴보지 못한 분위기를 잡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기왕에 해왔던 농민운동에 대한 이야기보다 정치나 사회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꽤나 흥분한 어조가 느껴지기도 했다. 감옥 생활을 견디면서 정치의식이 더 날카롭게 발전했음에 틀림없었다. 감옥에서 만났다는 어느 사람도 언급했는데 조봉암 사건과 연관된 인물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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